코로나 19와 함께 찾아온 자각
미세먼지 때문에 전국의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외출과 환기를 자제하고,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마스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다. 매점매석 때문에.
우한 폐렴이라더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그러다 코로나 19라는 멋들어진 이름까지 갖게 되더라.
코로나 19 때문에 외출을 삼가고 있다.
평소에 외출이라고 해봤자, 가끔 일이 있어 서울의 을지로나 강남에 가는 게 아니면, 해봤자 카페 몇 군데이거나 서점 가는 게 전부였는데. 이상하게도 바깥에 질병이 나돌고, 미세먼지까지 심해서 타의로 바깥에 나가질 못하게 되니, 이상하게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스스로 집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이런 시기에 약속 또는 행사 또는 면접(!)등의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이다. 흔한 약속이나... 행사 같은 것이야 아쉽구나 하고 몇 번 넘기겠다만. 면접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 취소되거나 미뤄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세 먼지,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 따위로 한 공간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하자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립된다는 것이 이런 건가? 폭설이 내려서 대중교통이 마비되어서 아무 데도 못 가게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러다 드는 생각이, 이러한 고립된 기간이 단순히 미세먼지와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만은 아니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된 지 7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샌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는 느낌이 막연해지기 시작했다. 늦잠을 자도 되는 것이 당연해졌고, 가끔 생기는 스케줄이 아니면 그저 집에서 빈둥대다, 구직 활동 좀 하고, 밤늦게까지 뭔가에 꽂혀서 하다가 지쳐 잠드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의 위력은 의외로 파괴적이었다. 하루의 루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몸은 한없이 편했으나, 시간에 쫓겨 뭔가를 해본 적이 최근엔 손가락을 꼽을 일이게 되었으니...
내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리듬이 무너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안 했더니 그것에 적응을 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게 된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을 자각하고 있을 때 오는 불안함은 그 어떤 다른 불안함처럼 나를 긴장시키진 않았다. 그러나 좀처럼 잊히거나 몸에서 떨어져 나가질 않는 유형의 자잘하고 끈질긴 불안감이었기에 심히 나를 당황시키고 있었다. 그제야 선배들이 했던 조언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일단 퇴사하기보다 이직할 곳을 마련해 놓고 퇴사해라.' 사정상 그때의 나는 일단 퇴사하는 것이 맞았지만, 선배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지금에서야 절실히 이해가 되었다.
나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곳의 소속으로서 다시 어떤 일상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이런 나태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 같다만. 꽤 오랜만에 이런 고립적인 맛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다시 나란 인간의 허무함과 한계를 알게 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고. 옆에서 쓴소리로 잡아주는 이가 없으니 이리도 흔들리는 것이다! 혼자는 이렇게도 나약한 것인가... 이런 자각을 하게 될 때쯤에는 혼자 반성하는 계기가 될만한 일기(지금 이런 글)따위를 나침반 삼아 다시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늠했던 것 같은데. 최근의 고립은 이런 나침반을 들여다보는 행위조차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나른함이었나 보다. 다시 이런 기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방향을 잡았다는, 나에게 다행이라는 신호일지도 모르겠다.
나침반 보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지 말아야지.
똑바로, 바르게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