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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꿀 Aug 11. 2019

퇴사, 그 고통과 긍정

퇴사를 할 때 쯔음에. 

19년 7월 26일. 여러모로 다양한 경험을 겪게 해 주었던 회사를 정식으로 떠나게 되었다. 브런치에 퇴사 이야기 한 번쯤 써봐야 제대로 해본 것이라던데. 나는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저번 글에선 불평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1년 반 이상 몸담았던 직장이라, 회사 문을 나설 때,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니던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은, 8시간을 서랍 정리와 파일 정리, 이메일 정리만 하며 하염없이 보냈고. 내 자리에서 회사 문 앞까지 나가면서 회사 앞까지 마중 나와주신 우리 팀원 분들께 정말 감사했다. 


퇴사. 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나와서 걷는 길은 장마철이라 많이 젖어있었다. 근처 백화점에 입점한, 좋아하던 맛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기차를 타러 가는데 정말 이제 영등포에는 올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감정들은 어떤 긍정적인 것이었을까, 부정적인 것이었을까...




퇴사를 하고 나서 3주는 정신없이 뒹굴거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휩싸여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놀다 보니 3주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고. 그렇게 보내버린 시간을 문득 뒤돌아보니 벌써부터 허망한 것이다. 3주가 아니라 3개월을 더 놀아도 이런 찌꺼기 같은 감정들이 남아있다면, 정말로 참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실 퇴사를 하게 된 계기부터, 퇴사를 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최근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많이 위축돼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해마다 겪던 좋지 않은 일들이 이번에도 벌어지나 싶었다. 퇴사 자체로 위축되진 않았다. 내가 내 능력을 믿으니까. 나름 특출 났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직전의 회사가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잘 맞지 않았음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그러나 회사 일 외적으로, 대외적으로 겪었던 이상스러운 일들은, 내가 한꺼번에 처리하기 힘든 너무 많은 양의 경험과 감정들이었다. 한 해에 한 번씩 그런 일들이 생겨났던 것 같은데. 올해도 역시나 그런 일이 없던 것이 아니었고. 


역시나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어떤 일들이 끝난 이후에도, 두 달이 넘게 버티지 못하고 흔들렸으니. 


힘들다, 힘들었다는 말이 나의 글에서 너무나 상투적으로 느껴질까 봐 잘 쓰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래도 이번에도 조금 힘들었다. 무엇 때문에 힘들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고민들이 있었지만...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정말로 위해주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받고 있는 걸까 하는, 본질적인 믿음에 흔들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성공했거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갑자기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가는 길에 정말 어려움이 없었을까? 정말로? 요즘 들어 습관적으로 내뱉던, '구김살 없는 사람 또는 삶'에 대한 이상이 있었는데, 최근에 들어서야 정말로... 정말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살면서 나 정도로 힘든 일 겪어본 사람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야... 그냥 고통이란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의 어깨에 짊어져진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그것을 이겨내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어떤 힘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을 성공하게 만들었던 힘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미 답은 뻔히 정해져 있었고... 단지 그 답안이 나에게, 각자에게 크게 와 닿느냐 닿지 못하느냐... 그 문제인 것 같다. 


긍정. 뻔하디 뻔하지만. 결국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긍정에 있는 것이다. 




긍정을 하게 만드는 배경에 대해서 또 생각하다 보니...


아버지가 버릇처럼 하시던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가... '밖에서 있었던 (힘든) 일, 집 안으로 들고 오지 마라'였다. 나라는 사람은 이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말 이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에 좀 더 동의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은... 맥락이야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어떤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이가 알아주질 못한단다.'였다. 대비되는 두 조언이... 지금 어머니, 아버지의 성향 차이와,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깊은 골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참 아팠다. 그런데 오늘 깨달은 긍정에 대한 생각은, 이전에 중점을 두던 어머니의 말씀보다, 앞선 아버지의 말씀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것 같아 놀라웠다. 


긍정의 힘이 동정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태 나는 긍정의 힘을 얻기 위해 동정심을 많이 이용했다. 힘들었던 일을 크고, 길게... 장황하게 설명하곤 했다. 내가 겪었던 고난은 무용담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조해주길 바랬다. 그러다 오늘에 와서야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곱씹어보고 나서야, 여태 내가 받아왔던 관심들이 동정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을까. 애초에 내가 바라던 것의 종류가 좀 많이 달라진 게 아닌가 싶었다. 정말 내가 원했던 것이 그런 것들이었을까... 그러다 보니 고난에 대한 서사 자체를 잘라버리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와 닿았다. 


아, 어쩌면 아버지는, 구차하게 말로써 힘듬을 표현하기보다, 행동으로써, 온몸을 다해 몸부림치고 계신 게 아니었을까. 집에 다다라서야, 현관에 구두를 벗어놓을 때쯤이 되어서야 받아들이시고 있던 고단함을 내려놓으실 수 있는 게 아닐까...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은 온 힘을 다해 뱉어낼 때가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온전히 사라지는 것인가...

... 그러고 나면 긍정할 수 있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굳이 나만의 고통에 대한 서사를 멈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나의 방식이 이런 것이고... 앞으로 아버지의 방식도 많이 써먹어보고,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가 만약, 오늘 너무나도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면...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중엔 반드시, 지금의 이겨내는 힘을 바탕으로 그 어떤 고통이든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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