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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룸

White Room

by 유하







작가에게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블랙, 블루, 화이트.










3-2. 화이트 룸

White Room





1920px-White_on_White_%28Malevich%2C_1918%29.png Kazimir Malevich, White on White, 1918. Oil on canvas, 79.4cm×79.4cm, MoMA, NYC.





역사는 방 안에서 탄생한다. 정말 고단하고 불쾌하니? 나 자신으로 산다는 거 말이야. i는 중얼거렸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나에게 공간을 선물한다면. 나를 살게 하는 음성과 혼과 개념과 특별한 사물들로 한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단 하나의 공간만이라도 온전히 나를 위해 채워 본 적이 있는가. 한 공간이 내가 되게, 한 명의 인격체가 되도록 만들어 본 적이 있는가. 더 큰 야망을 갖기 이전에, 관계를 맺기 이전에,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우선은 과거를 떠들고, 미래를 떠들고, 현재 속에서 떠들고, 떠들고, 떠들고.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듯이 나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다. 신이 나는 사실은 정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대신 유령의 방문을 무서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개인의 힘을 무분별하게 폭발시킨다. 무감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배려와 눈치 사이를 어정쩡하게 배회하며 억눌러야만 했던 욕망과 애정, 욕지거리, 미처 발산되지 못했던 불순한 감정과 거룩한 신념을 하나둘씩 꺼내어 다양한 각도에서 면밀히 관찰한다. 그 다음, 그 귀한 것들을 이리저리 깨고 그 파편들을 크고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구석구석 마구 내던진다. 이렇게 에너지를 마구 쏟았으니 흰 쌀밥을 지어 먹는다. 밥알 개수를 미련하게 세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새로 지은 밥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고 밥솥이 내뿜는 안정된 연기 속에 내가 있음을 언제나 기억한다. 다음으로는, 알록달록 들쑥날쑥 난리가 난 방을 희고 깨끗하게 정리한다.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자로서 어질러진 방을 희고 깨끗하게 정돈한다.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며, 그 리듬에 맞춰 설거지를 한다. 방금 전, 실컷 깨부수는 단계를 이미 겪었으므로, 이번 단계에서 접시가 깨져서는 안 된다. 혹시 실수로 깨지면 이미 지난 일이니 쿨하게 생각하고 버린다. 바닥을 물로 닦고, 헝겊으로 한 번 더 닦는다. 새하얀 방을 둘러본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치열한 상호작용의 흔적들이 보인다. 나를 살게 하는 음성과 혼과 개념과 특별한 사물들이 알맞은 자리에 대체로 규칙적으로, 때로 불규칙적이지만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열린 창문 안으로 봄 아지랑이가 우아하고 차분하게 스며든다. 인격체. i는 엷은 미소를 짓는다. 인격체로 거듭난 방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 큰 공간 속을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저벅저벅 당차게 걸어다니며 춤을 추듯 유연하게 떠다닌다. 돈다. 돈다. 돈다. 그리고 뻥 하고 폭죽처럼 터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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