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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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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아직 한파와 같은 강추위가 오지는 않았지만, 스멀스멀 찬 기운이 점점 강해지며 몸을 움츠리게 된다. 벌써 입주한 지 8개월. 시간 참 빠르다.


오늘은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태준이네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친정에서 나물 반찬을 잔뜩 보내왔다며, 오늘 점심은 뭘로 때우나 고민하던 내게 태준 엄마가 제안한 것이다.


매번 만나기로 할 때면 브런치를 먹으러 가거나 단지 내 커뮤니티에서 봤는데 집은 또 처음 가본다.


태준이와 은지 사이는 민지와 은재 사이와는 다른 뭔가가 있다.


은지와 태준이는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지만 이성이라 그런지 그다지 친하지 않고, 하원하고 같이 놀이터에서 논 적도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서로의 집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오늘 처음 태준이네 가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내 살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참 어려웠다. 내 전부를 평가받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동안 내 집에 누가 오는 것도,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가 우리 집에 와야 할 때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애 키우는 집이면 응당 집이 깔끔하지 못해도 나를 이해할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맞벌이를 할 때는 괜찮았지만,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살림도 못한다는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던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아이 케어가 회사일보다도 어렵다는 것은 살림하는 여자들만 이해하는 일인지라 살림만큼은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에서 오는 것일 테다.


어디 직업란에 뭐라도 적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전업주부라고 적을 때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대학까지 나와서 직업이 전업 주부라니.

없다고 쓰긴 자존심 상하고, 전업주부라고 쓰긴 허탈하고.


내 직업, 내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사? 집안일? 허탈을 넘어 좌절스럽기까지 하다.


주변에 맞벌이하면서 살림까지 빈틈없는 슈퍼우먼 같은 여자가 없길 바랄 뿐이다.


태준이 엄마도 혹시 나와 같은 심정일까, 혹시나 집이 깔끔하지 못할 때 어떤 멘트가 좋을지 고민했다.


너무 지저분하지 않은 한, 들어가자마자 '어머, 애 있는 집이 어쩜 이렇게 깔끔해요.'로 정했다.


그리고 괜히 신세 지는 것 같아 집에 가기 전에 마트에 들러 태준이 간식과 우리가 먹을 디저트를 준비했다.


'띵동'


주인만 바뀌었을 뿐 그동안 자오던 곳인데 괜히 긴장이 된다.


"네! 언니, 어서 들어오세요!"


동생이 없는 내게 언니란 호칭은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가 않다.


"어머!" 


집에 들어가자마자 하려고 준비한 멘트가 나오다 멈췄다.


"애 있는 집이 어떻게 이렇게 깨끗해요?"


원래 하려던 멘트보다 어조가 강해졌다.


애를 키우는 집이 맞는지,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첫인상이다. 장난감이며 살림살이가 깔끔히 정리가 돼 있다.


같은 평수에 대칭이지만 똑같은 구조의 우리 집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집주인인 민지네와도 비교가 됐다.


나는 그래도 애가 둘이지만, 민지네는 똑같이 아이 하나 있는 집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다. 심지어 이 집은 에너지 넘친다는 아들이 있는 집인데도 꼭 신혼부부 사는 집 같아 놀랐다.


"에이. 아니에요. 오시기 전에 급하게 정리한 거예요. 뭐 이런 걸 사 오셨어요. 디저트도 다 준비했는데, 고맙습니다."


이 여자, 겸손하기까지 하다.


갖가지 나물에 친정엄마가 직접 담그셨다는 고추장,

시골에서 짜 왔다는 참기름 밥과 계란 프라이까지 넣고 비비니 여느 맛집과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맛있게 느껴졌다.


"어머님 요리 솜씨가 엄청 좋으시네요."


직접 음식을 차리고 준비한 태준 엄마에 대한 칭찬보다 본심이 앞서 나왔다. '아차' 싶던 찰나 태준 엄마가 대답을 한다.


"네, 엄마가 원래도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이셨는데, 최근 문화센터 쿠킹 클래스에 다니시더니 음식 솜씨가 더 좋아지셨더라고요. 나물 많이 주셨는데, 조금 싸드릴까요?"


이렇게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겨우 그녀를 말렸다.


식사를 다 하고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사 온 과일과 그녀가 준비한 롤케이크를 같이 접시에 담으며, 커피를 직접 내려주겠다고 한다.


"직접 집에서 내린 커피는 처음이에요. 잘 마실게요."


긍정의 답변을 하고 같이 식탁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한사코 괜찮다며 나더러 잠시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한다.


얼떨결에 거실로 오니 말끔하게 정리된 책장이 보인다.


태준이는 어떤 책을 읽는지, 태준 엄마는 어떤 책을 읽어주는지 궁금했다.


얼핏 보기에 아래쪽에는 아기 책, 중간에는 엄마, 아빠가 읽는 책, 맨 위에는 사진들이 액자와 함께 놓여있었다.


가장 먼저 맨 아래 꽂힌 아이 책을 보니 내가 은지한테 읽어주는 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진이 많이 들어간 자연과학 책이 눈에 띄었다. 조금 이따가 디저트 먹을 때 저 책에 대해 물어봐야겠다생각하며 굽혔던 다리를 폈다.


그리고 시선이 점점 위로 올라와 경제 관련 서적, 인문 서적 등이 꽂힌 칸을 지나 맨 위 사진이 있는 칸으로 옮겨다.


여러 개의 사진 중에 가족사진에 눈이 간다.


"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고, 뒤통수가 한겨울 세찬 바람이 스친 듯 오싹한 느낌이 든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한참을 들여다았지만, 역시나다.


그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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