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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301호 세입자 김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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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그놈이 꿈에 나왔다.


이번에는 헤어질 당시의 매몰찬 모습이 아니라, 한창 사랑하던 때 한 없이 자상한 모습이었다.


보통은 헤어지는 그 순간 내가 그놈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내면 깊은 곳에서 잡아 보지도 못한 것이 후회가 되는 건지, 보통은 처절하게도 내가 울며 불며 애원하는 그런 상황이다.


오랜만에 재수없게시리.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변해버린 사랑을 두고 떠난 현실의 결말을 알아서인지, 한 없이 자상한 그 모습이 가식적으로만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런 꿈을 꾸면 그때도 생각나고 그때의 나도 생각나고 아련해지면서 하루 종일 힘들었는데, 요즘은 그냥 찝찝하고 기분만 무거워진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민지네가 떠나고 마음이 허전했는지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나 보다.


지난번 아쉬웠던 저녁식사 이후 몇 번 더 민지 엄마와 식사도 하고 시간을 보낸 뒤에 민지네는 부산으로 떠났다.


은재도 한동안 속상해하고 민지가 보고 싶다며 힘들어했지만, 충분한 시간이 흐르자 은재도 서서히 아픔을 잊어갔다.


요즘 유치원에서 다른 친구와 뭔가를 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연스럽게 민지 아닌 다른 친구 이름이 많이 나오는 게 다행스럽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가 은재의 마음속에 다시 자리한 것처럼, 301호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자리했다.


민지 엄마가 이야기해 준대로 싹싹한 성격에 바라보기만 해도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그런 선한 사람. 거기에 참하고 단아해 보이는 얼굴까지. 딱 봐도 호감형이다.


그녀는 이사를 오자마자 떡을 들고 인사를 왔다. 전세 계약을 하면서 몇 마디 듣지 못했을 것 같은데도 '말씀 많이 들었다'는 사회생활력이 곁들여진 멘트에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처음 사귄 민지 엄마에 대한 아쉬움이 짙어서 그런지, 그 자리새로 이사 온 아이 엄마가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둘째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운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높았다.


301호 아기 엄마는 민지 엄마가 말했던 대로 우리 둘째 딸 은지와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게 다고 했다. 우리는 또 별 것도 아닌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며 친해질 준비를 했다.


이제 나의 새로운 친구가 된 태준이 엄마 김수미.


나보다 세 살 어리며, 아이가 세 살인데도 일을 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휴직과 복직이 자유로운 프리랜서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가끔 대화하다 문장에 영어 단어가 들어있으면 발음이 매우 원어민스러운, 나와 먼 부류의 사람 같을 때가 있는데 외국어 관련 일을 하는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이가 아파서 등원을 안 하는 등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 하원 시킬 때 꼭 한 번은 만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한 달 같이 점심도 먹는 사이가 됐다.


또 다른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겼다는 안도감과 함께 낯선 사람에게 갖는 경계심이 조금씩 풀어진다.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결혼 생활과 육아 경험도 적으며, 무엇보다 아직 집이 없는 진정한 안착을 하지 못한 태준 엄마가 인생사 전반에 대해 여러모로 가르쳐 줘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나는 말이 많아지고, 그녀는 나의 말을 웃으며 잘 들어준다.


이것저것 사소하고 피곤한 내 충고에 귀 기울여주고 말이라도 그렇게 해보겠다 말하는 그녀.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예쁜 친동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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