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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케이 Oct 17. 2021

양평동의 가을

4. of 16

가을비가 내린다. 올해 마지막 비일 것 같다.


며칠 전, 민지 엄마가 내게 이번 주말의 일정을 물었다. 내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자, 자기네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301호 애기 엄마와는 처음 만난 날 이후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낸다. 같은 '경단녀'라는 공통점에 딸아이들끼리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유치원에서 하원할 때 쯤, 유치원 버스에서 아이 둘이 같이 내리면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우리 집 둘째가 잠이 들어서 밖에 못 나가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저녁 먹고 놀기도 한다.


이제는 아빠들도 같이 식사하고 키즈카페도 가는 등 가족끼리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주말 저녁이 되고 디저트로 먹을 치즈케이크 하나를 사서 옆집으로 건너갔다.


엄마들은 먹는 둥 마는 둥 아이들 밥을 먹이고 있고, 아빠들은 연신 소주잔을 기울인다.


아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민지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6살이 되니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돼서 너무 편해졌다.


은지도 언니를 따라 같이 놀다 보니 은재가 세 살 때처럼 힘들지만은 않다. 이제 우리 부부도 육아로부터 여유가 생긴 요즘이다.


그렇게 어른들만의 시간이 됐다.


민지 아빠가 뜻밖의 말을 꺼낸다.

남편과 같이 술이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벌겋다.


"제가 부산으로 이동 발령이 나서 다음 달에 저희가 이사를 가게 됐어요. 이 말씀 드리려고 겸사겸사 술 한 잔 하면서 저녁 먹자고 했어요."


모두가 얼어붙었다.


잘못한 것 없이 민지 엄마아빠는 미안한 얼굴이고, 나와 남편은 놀란 토끼눈이 됐다.


나는 은재 걱정이 앞섰다.


민지는 동네에서 뿐만 아니라 유치원에서도 가장 친한 단짝이다. 여자 아이가 단짝 친구와 이별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도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남편이 그의 상황을 고려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고, 그래도 승진 같은 걸로 잘 돼서 가시는 거죠?"


안 좋은 일로 가는 거면 어쩌려고 냅다 저런 질문을 던지나 했는데, 다행히 그쪽 회사는 어느 정도 직급이 되면 지방 순환근무를 한다는 걸 남편이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입주한 지 6개월밖에 안됐는데 집은 팔고 가시는 거예요? 양도세 비과세 혜택 받으려면 거주기간 요건을 갖춰야 한다던데."


평소에 눈치 없고 둔한 곰탱이 같던 남편의 질문 수준이 꽤나 높다. 나도 묻고 싶었던 질문을 저 곰탱이 남편이 대화를 리드하며 답을 이끌어내고 있다.


요즘 부동산 카페에서 '양평동 센스쟁이'로 활동한다고 했다. 퍽이나 어울리는 아주 잔망스런 닉네임이다.


"비과세 혜택 받으려면 2년을 직접 거주해야 하는데, 지방 발령 같은 걸로 예외사유 인정받으려 해도 1년은 살아야 해서 급히 전세 놨어요. 길어야 2년 정도 가는 거라 다시 올라올 거예요."


민지 아빠가 얼마에 전세 놓고 가는지도 바로 이야기해주면 좋으련만, 그의 대답거기서 멈춘다.


보통 저층 아파트는 일조량 등의 핸디캡이 있어서 매매나 전세 시세가 다른 중층 이상의 가구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는, 구체적인 금액이 궁금했다.


"얼마에 전세 주셨어요?"


나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한다.


"급하게 내놓은 거라 5억에 내놨고, 그 주 주말에 바로 집 보러 와서 계약까지 했어요."


5억 원. 분양가보다도 높은 전셋값이다.

우리 집을 당장 전세로 돌려도 5억은 생긴다는 뜻이다.


당장 전세를 놓을 것도 아니면서 그 큰돈이 생기면 뭘 할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던 찰나에 민지 엄마가 말을 한다.


"전세 계약할 때 보니 새로 이사 오는 세입자네 아이가 은지랑 동갑이던데, 세 살 남자애였어요.


애기 엄마가 성격도 활발한 것 같던데, 우리처럼 친하게 지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은지 다니는 어린이집도 알려줬더니 알아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이사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에서인지 민지 엄마가 내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순간 은지가 언니들이 노는 방에서 놀다가 어딘가 부딪혔나 보다. 쿵 소리와 함께 아이가 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집에 가자는 신호처럼 들린다.

그렇게 아이 아빠는 은지를 안아 달래고 나는 뒷정리를 도우며 자리를 끝냈다.


이사 와서 처음 맞는 가을이 참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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