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신세기 사이버포뮬러》다. 이 만화는 주인공 하야토가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인공지능 사이버 머신인 아스라다의 레이싱 드라이버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만화는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 vs 인간의 대결처럼 보인다. 주인공 하야토를 중심으로 그의 라이벌인 카가와 란돌프가 경쟁을 하면서 누가 더 나은 레이싱을 벌이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보면 이 만화는 인간 vs 머신의 대결구도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신세기 사이버포뮬러 세계관에서 자동차 머신은 시속 600km 이상을 달린다. 이 상황에서 머신이라고 불리는 자동차의 테크놀로지 경쟁은 매우 뜨겁다. 인간의 판단과 기술로 머신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기술과 엔진 능력으로 승패가 갈린다면 여기서 과연 드라이버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신죠는 인공지능 사이버 머신에 의존한 레이싱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사이버포뮬러가 아닌 F1에 도전한다. 그는 레이싱을 할 때 머신도 필요하지만 달리는 건 나라고 말하며 드라이버의 주체성에 더 무게를 싣는다.
우리는 《신세계 사이버모퓰러》에서 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를 꽤 많이 경험한다. 내가 주도적으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건에 맞춰 내가 변화해야 할 때가 그런 경우다. 상황과 대립하며 나의 주체성을 견고히 지킬 것인지 아니면 나의 주체성은 지워버리고 상황에 맞는 나로 탈바꿈 시킬지 말이다.
특히, 연예인들은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연예인들의 자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들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심한 통제다. 빌보드 매거진의 아시아 톡파원인 롭 슈워츠에 따르면 ‘팬들이 모든 움직임에 집중하고 헤어스타일에 대해 글을 남긴다. 어떻게 이렇게 현미경처럼 관찰할 수 있는지 놀랍다’고 했다.
연예인은 가면을 쓴다. 늘 자기를 지운다. 소속사가 잡아준 콘셉트로 자신을 꾸미고 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탈바꿈 시킨다. 그 모습이 실제로 자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팬들은 나의 실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꾸며진 모습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자아가 유독 강하다면 그 생태계에서 버티기가 힘들 수 있다. 많은 연예인이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건 자신의 강한 자아와 대중이 자신을 바라보는 간극 사이에서 충돌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B인데 대중은 A라고 보거나 나는 A가 싫은 데 대중이 원하는 건 A기 때문에 자신의 B를 무너뜨리고 A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이 상당할 것이다. 하나의 자아가 유독 강하면 그 자아를 버리는 고통을 버티기 힘들다.
가수 정세운은 자신의 자아를 상황 별로 여러 개로 설정해 하나의 팀으로 조직한다고 말했다. 그걸 일명 ‘팀 정세운’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능에 나갈 때나 라디오 DJ를 할 때, 노래를 부를 때, 음악을 만들 때 등 상황에 맞춰 자아를 교체한다고 했다. 그는 방송을 하면서 음악도 하기 때문에 정체성이 혼란한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걸 극복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 바로 ‘팀 정세운’ 인 것이다.
우리는 직장이나 가족 그리고 친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거기에 ‘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나다. 그렇다고 정세운이 사람들에게 가식적인 가면을 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배려다.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때와 사람에 맞춰 변화할 뿐이다. 작사가 김이나는 정세운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코멘트 한다.
정세운의 말을 잘못 이해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가장 강력한 자아는 자신을 텅 빈 '제로'로 만드는 상태다. 강한 자아는 늘 자신을 잃어버릴 줄 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상황과 사람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은 웬만큼 자아가 강하지 않고서는 그러기가 어렵다. 그렇게 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자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없다면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없다는 건 그 제로의 공간만큼 자신의 강력한 자아가 차있는 거나 다름없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 집에 기르던 강아지 바둑이는 매일 집 밖을 나갔다. 하루, 이틀, 삼일 어쩔 때는 1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바둑이를 찾지 않았다. 할머니와 삼촌은 "알아서 찾아온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둑이는 제 발로 집을 찾아왔다. 바둑이가 제 발로 집에 찾아온다는 할머니의 믿음처럼 상황에 따라 나의 자아가 가출을 해도 언젠가 나의 코어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돌아온다는 믿음만큼 가장 강력한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를 내가 관리해야 할 소유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점점 힘들어진다. 타의로 내 자아가 손상되거나 빼앗기거나 바뀔 때 우리의 박탈감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가 단지 소유물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자아를 한결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 안에 있으며 나의 존재능력, 나의 기본적 힘의 발현능력은 내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자신의 자아를 소유가 아닌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내 안에 다양한 자아가 부대낄 이유가 없다. 자신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는 건 그만큼 자신에 대한 컨트롤 능력과 메타인지력이 높다는 방증이다. 타인 때문에 나의 자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만큼 나의 강력한 자아를 증명하는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