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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r 11. 2024

감정은 비싸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알리 러셀 혹실드는 1983년도에 처음으로 ‘감정노동’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이후 2010년에 한국에서도 그의 저서가 번역되면서 ‘감정노동’이 한국 사회에 한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당시 88만원 세대론과 맞물리면서, 인위적인 감정으로 노동해야 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감정노동’의 복잡한 사회학적 문제를 차치하고 ‘감정’을 노동의 관점으로 바라본 점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건 바로 감정을 노동의 가치로 산술했다는 점이다. ‘감정노동’ 이전에는 ‘감정 서비스’ 를 그저 노동에 수반된 예의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이 던져지면서 감정을 노동 그 자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이제 감정도 노동이다. 무거운 시멘트를 이고 나르는 육체적 노동과 매일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하는 정신적 노동뿐만 아니라 감정도 노동의 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우리의 감정적 에너지를 화수분처럼 끝없이 퍼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관리하듯 감정도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의 쓰임에 관대하다.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비하면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복잡하게 만든다.


복잡한 자신의 감정을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 고(故) 박완서 작가는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다.’라고 말한 적 있다. 사물의 이름을 아는 순간 그 사물은 다르게 보인다. 이건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안다면 스스로를 다르게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감정의 스펙트럼을 세밀하게 분광하는 훈련이 덜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감정을 억제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가 나도 참아라, 기뻐도 너무 티 내지 마라, 슬퍼도 울음을 삼켜라, 등 감정을 억제하고 컨트롤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은 가볍다고 여겼다. 《감정 어휘》를 쓴 유선경 작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못 내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감정’을 깊숙이 파묻고 ‘이성’이라는 널빤지로 못을 쳐놓고 살았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야 한다고까지 세뇌 받았다. 감정은 숨기고 다스리고 제어해야 할 작은 악마 같은 취급을 받았다.


감정에는 선악도, 옳고 그름도 없다. 감정은 그저 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그 실체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다. 분노와 슬픔은 그른 감정인가? 기쁨과 설렘은 옮은 감정인가? 우리는 그 어떤 잣대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면 자유롭게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은 특별하다. 고통스러운 감정에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슬픔은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눈을 번뜩이게 한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갈라진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단지 ‘슬픔’이라고 뭉특하게 본다면 우리는 그 감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가 힘들다. 자세히 감정을 들여다봐야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다. 감정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유선경 작가는 감정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고 제대로 이름을 붙여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해야 할지 길이 보여서이다. (중략) 죽음, 이별, 희생, 궁핍, 불우함, 학대, 버려짐, 빼앗김, 차별,소외감, 고립감, 비난, 무시, 굴욕, 수치심, 서러움, 외로움, 부당함, 억울함, 상실감, 무력감, 배신, 시기, 죄책감, 회한, 원망, 고뇌, 혼란, 압박감, 걱정, 고민, 미움, 낙담, 체념, 절망, 비관, 위협, 무서움 그리고 아름다움과 연민, 허무에 이르기까지...... 이 전부를 슬픔이라는 한 가지 감정으로 묶기는 어렵다. 슬픔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신호로 위로나 애도가 필요한데 아픔 중에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을 해소하는 데 충분치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감정은 정보다. ‘아픔’이라는 감정은 가장 즉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아픔은 그것을 느끼는 당사자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부모님의 죽음, 혼자라는 외로움, 과거에 대한 후회, 꿈이 좌절되었을 때 등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을 겪거나 같은 감정이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서 느끼는 아픔은 그 채도부터 다르다. 즉, 같은 종류의 감정이지만 강도가 다른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전달되는 정보의 양과 나에게 각인되는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감정의 강도가 셀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이 감정의 원인이 뭐지?’라고 말이다. 자신의 감정만을 들여다보고 분석한다면 그 원인을 찾기 어렵다. 감정의 원인이 된 행동을 파악하면 쉽게 원인을 분석 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법은 감정의 원인을 파악하는 힌트가 된다. 


배우들이 감정 연기를 할 때 그들은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행동을 통해서 감정을 끌어 올린다. 예를 들어, 경쟁자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감정을 연기할 때, 아마추어 배우들은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복수심을 억지로 떠올리면서 연기한다. 하지만 노련한 배우들은 ‘복수를 행동한다.’ 즉, 주먹을 꽉 쥐거나 어금니를 깨물면서 복수심을 연기한다. 감정 보다 행동에 집중하면 거기에 맞는 감정은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배우들은 감정을 연기하기 위해 행동을 분석한다. 그럼 반대로, 나에게 불러일으켜지는 감정을 해부하기 위해서는 감정 앞에 있던 행동을 분석하면 감정의 실체가 뚜렷해진다. 감정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감정은 나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서다. 철학자 강신주는 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일까? 이것은 감정의 강력함에 직면했던 인간의 절망스러운 소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 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제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정만큼 비싼 게 없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특히 분노는 더욱 그렇다. 비싼 내 감정을 그런 식으로 쓰고 싶지 않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이런 곳에 내 감정을 쓰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차분히 내 감정과 거리를 둔다. 반대로 좋은 감정은 얼마를 지불하고서라도 사고 싶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느끼기 힘들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지 느낄 수 있는 것이 기분 좋은 떨림과 같은 감정이다. 감정 때문에 쉽게 상처 받고 일희일비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감정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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