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헤어졌던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부산에 있던 시네마테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강좌를 들었다. 나는 다큐에 대한 다큐라는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고 무사히 상영까지 마쳤다. 상영회를 하면서 나는 난생 처음 GV라는 것을 했다. 영화를 보여주고 감독인 내가 직접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리였다. 나는 같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누나로부터 내 작품을 인상 깊게 봤다는 여자를 그 자리에서 처음 소개 받았다.
그 여자는 나 보다 2살 연상이었지만 훨씬 어려 보였고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예뻤다. 20대 초반의 남자애가 그것 말고 볼게 뭐가 더 있었겠는가. 그 이후에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그녀와 나는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동안이었고 얼굴도 예뻤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의 감각적인 외모에 빠져 그녀와 사귄 것이지 성격이나 품성 혹은 나와 결이 맞는지 여부를 생각하고 사귄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사귈 성질머리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더 이상 그녀의 외모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쁜 외모에서 느꼈던 초반의 설렘이라는 감정이 무뎌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와 나 사이에는 권태감이 찾아왔다. 그 권태감은 그녀와 나 사이를 불편하게 했다. 고작 30분도 같이 있지 못했다. 이미 바닥난 케찹에 포테이토를 계속 비비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포테이토를 다 먹고 그녀를 바라봤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 왜 이렇게 못생겼지’
처음에 그녀의 외모는 나의 말초감각을 자극했다. 그 감각적 자극이 둔화되자 불편함이라는 부정적 기능이 나를 덮쳤다. 그리고 나는 그 부정적 기능을 감각적으로 해석했다. 바로 ‘불편함(기능)은 추함(감각)’ 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 연애에서 얻은 교훈을 다음 연애에 적용했다.
그 다음에 사귄 여자도 얼굴이 예뻤다. 나는 지난 연애에서 외모적인 설렘이 사라지고 난후 권태감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편안함이라는 기능이 솟아오르는 시기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시기에 나는 집중했다. 그 편안함이라는 기능을 느꼈다. 편안함이 권태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바뀔 때 편안함이라는 기능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편안함(기능)은 예쁨(감각)’이라고 말이다. 그저 같이 있을 때 편해진 내 마음에 집중하자 그녀가 예쁘게 보였다.
나의 연애관은 이렇게 업그레이드 됐다. 처음에는 얼굴만 보던 미(美)라는 감각의 영역에서 편안함이라는 기능의 영역으로 발전했고 그 다음은 편안함을 예쁘게 보려는 기능성 감각으로 다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우리는 편안함을 예쁘게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라는 감각과 편안함이라는 기능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능을 통해서 감각을 해석할 수 있고 감각을 통해서 기능을 해석할 수 있다. 감각과 기능은 일맥상통한다. 마치 내가 편안함이라는 기능을 예쁨이라는 감각으로 해석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대상이 추한 이유는 그 대상이 불편성을 내재하고 있거나 내 마음 속에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대상이 안고 있는 불편성을 편안하게 수정하거나 내 마음을 편안하게 고쳐먹는 방법이다. 그런데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부처 아니고서야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뿔이 달린 물컵을 쓴 적 있다. 그 컵으로 물을 마시려면 뿔이 계속 내 눈을 찌른다. 그 컵은 불편하다. 고로 나에게 그 컵은 추한 컵이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로젠크란츠는 추함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규칙성과 통일성 사이에는 존재들의 직접적인 다름이, 즉 상이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데 이것의 다채로운 다양성은 미적으로 아주 즐거울 수 있다. (중략) 그러나 서로 극단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삭막하게 혼란스러워질 경우에 추로 전환된다. 그런 것들의 덩어리에서 다시금 특정한 부류가 형성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그 다양성은 곧 부담스러워진다.
물을 편안하게 마실 수 있게 하는 물컵의 본질적인 규칙성에서 뿔이 추가되는 것은 재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뿔이라는 다양성은 물컵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혼란만 부추기므로 그것은 카를 로젠크란츠의 말대로 추로 전환된다. 제 아무리 내가 마음을 고쳐 잡고 예쁘게 그 컵을 보려고 해도 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물컵을 사용할 수는 없다. 내 마음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우선 적극적으로 물컵의 뿔을 자르는 교정 작업이 필수다. 그 대상을 고칠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으나 고칠 수 있다면 고쳐야 한다. 당신이 도를 닦는 도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불필요한 고통이 제거되었을 때 아름다움은 드러난다. 스티브잡스가 말한 애플의 미학이 바로 그 경우다. 플라스틱 버튼식 키패드 때문에 앱환경이 변해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다. 불필요한 고통이다. 스티브잡스는 플라스틱 버튼을 멀티 터치 스크린으로 교정했다.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한 편안함은 그 자체로 아이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했다. 뿔 달린 물컵이 추함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거기에는 불편함이 있고 아이폰에는 단순한 편안함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래서 아름다운의 본질은 편안함이다.‘자유의 모든 감정과 의식이 아름답게 하며 모든 부자유는 추하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카를 로젠크란츠는 말한다. 당신 삶의 아름다운 쾌감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고통이 제거된 편안함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