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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Dec 15. 2021

카프카의 변신과 불치병

20대 나의 두려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있는데 내가 벌레가 되어있다면 어떨까?

카프카가 쓴 ‘변신’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남자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 소설이 나의 20대에 던져준 의미는 매우 컸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두 가지 이유 모두 다 그 이후의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는 예술작품을 대할 때의 나의 시선과 관련 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유명 작가와 제목으로만 알고 있다가, 대학교 세계문학수업(교양)에서 처음 읽게 되었다. 교수님이 독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이 소설을 소개하고 설명하시는데 전공자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학생들에게 그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던 열정이 전달됐었던 수업으로 기억한다.

영문과 전공이어서 나에겐 익숙한 문학수업 패턴대로  작가의 생애, 시대 배경, 줄거리, 리포트 정도의 수업이나 발표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 소설을 읽어오는 게 과제여서 학생들이 대부분 읽어왔을 텐데도 따로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시간을 내어 몇 부분 읽을 시간을 주고 짚어주시며  설명을 해주셨다.


예술… 특히 문학을 감상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것을 주의 깊게 눈여겨볼 것이며 어떤 비판적(critic; 부정적이기만 한 비판을 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지)인 태도가 필요한지 등등에 대해 내게 알려주었던 수업이었다. 교수님이 읽어보라고 하신 부분을 다시 죽 읽고 있는데 그 조용한 강의실에서 대학생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주인공의 집 앞에 병원이 있다는 걸 읽으면서 깨달은 학생?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정말 병원이라는 단어가 있었나? 책을 훑어보았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교수님의 설명이 이어졌고,

아... 정말 있었다. 소설의 한 부분 한 챕터 안의  한 단어, '병원'. 정말 무심코 툭 던져놓은 듯한 소설 속 한 단어였다. 나는 그것을 놓쳤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물건을 볼 때나 건물을 쳐다볼 때 그것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냥 항상 그 자리에 놓여있거나 별 이유 없이(따지고 보면 이유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말이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라 신경을 크게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작품 속에서는 그냥 놓여있는 것은 없던 것이다.

쉼표 하나.. 건물.. 물건.. 어떤 단어 하나 조사마저.

작가가 어떤 예술품을 만들어냈다면, 특히 고전작품으로 남았거나 명작이라 칭송되는 거라면 더더군다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밀하게 계획되고 하나하나 상징성을 띠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감상해야 한다.


병원... 그렇구나.. 병원이 집 앞에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구나... 병원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는 것 하나를 암시함으로써 얼마나 그 의미의 폭이 달라지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가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급하게 쓱 읽느라고 그 중요한 단어를 놓쳤구나...

조용히 강의실에 앉아 그 이후 수업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충격을 받았었다.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

그레고그 잠자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왔었다가 점차 시름시름 아프더니 벌레로 변한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약간 걱정하는 듯하다가, (가장으로서의 그가 벌이를 해오지 못한다는 공포가 컸을 것이다) 나중에는 잠자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급기야 아예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점점 방에서 외로이 홀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있다가 아빠가 던진 사과에 맞아 아프다가 죽고 만다.


이 소설이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앓게 된 자가면역질환과 관련이 있다.

내가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한껏 좋기만 해도 됐을 20세.. 21세 즈음 불치병(또는 난치병 또는.. 자가면역질환이지만 불치병이라고 하면 뭔가 드라마틱해서 선택했다.ㅎㅎ)에 걸려 고생을 했다. 지금까지 딱 두 번 입원했던 게 다 20대 초반이었다. 그 두 번의 입원 중 심각하게 아프고 증상을 완화해주는 스테로이드제마저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수술 직전까지 갔던, 2달간의 입원기간이 있다. 아파서 별 생산적이거나 긍정적 생각은 없이 분노만 가득 차 있었고 아파서 신음소리 내는 사람들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금식 상태였다. 금식 상태였는데도 30분마다 한번, 한 시간마다 한번 화장실에 가야 할 정도로 배가 아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피를 쏟아내서 체력도 약해져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못하고 있었고, 할 수도 없던 정말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 날 내 옆자리에 나보다 10살 더 먹은 여자가 입원했다.

같은 병실을 쓰다 보니 같은 병실에 누워있다 보면 여러 집안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되어 싫던 좋든 간에 공유하게 된다. 그 여자분은 궤양성 대장염인 나와 약간 다른 병으로 입원했다. 크론씨병.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처음에 아프다고 할 때는 남편이고 시댁이고, 지극하게 돌봐주고 문병 오곤 했는데 아플 때마다 아프다 아프다 했더니 어느 순간 지겨워했단다. 병원비가 아깝다고 했고, 시어머니는 너 때문에 자기 아들이 고생한다고 타박을 했다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결국 이혼을 했단다..

고작 10살 된 아들이 병실에 엄마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밤마다 옆자리에서 그 여자의 흐느껴 우는소리가 들렸다.

가끔 지인들과 통화를 하는데 아파서 그런지 내가 듣기에도 살짝 까칠하게 대답하니, 상대의 반응이 마땅치 않았는지 끊고 나서 화만 더 냈다.

여기 장기간 입원해있느라 얼마 전에 들어간 직장에서 침대에  해고 전화를 받을 때도 난 옆자리에 누워있었다. 여러 번 상황을 설명했지만 상대 쪽에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자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고작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옆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었다. 아니, 충격을 넘어 공포감까지 느꼈다.


아... 아플 때마다 아프다고 하면  버림받는구나. 힘들 때마다 힘들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싫어하는구나. 짐이 될 수도 있구나...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 여자의 상황이나 내가, 아파서 누워있느라 내가 해야 할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그 상황이 바로 이 소설에서의 벌레로의 변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슬프지만, 그리고 각자의 사정이 있지만 주어진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이 겪는 고립감, 허탈감, 혼자 남들과 다름. 남에게 짐이 된다는 두려움, 결국은 혼자만의 감옥에 갇혀버릴 것 같은 공포 등등...


그래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퇴원하고 나서 체력을 약간 회복하자마자 나는 항상 멀티플레이어로 살아왔던 것 같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지 않고, 대학교 다니면서 봉사활동이나 온갖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려고 노력했던 기록이 그 당시의 다이어리에 적혀있다.

아프거나 힘들 때도 조금 아프거나 약간 힘든 일은 잘 얘기하고 다니지만, 많이 힘들거나 마음이 깊게 아프거나 몸이 병 때문에 아픈 것 같으면 오히려 얘기하지 않는다.


변신…

20대의 나에게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한 가지라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족 구성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공포를 주었던 작품이다.

 그 이후로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읽어보지 못했다.

올겨울에는 꼭 시간을 내서 읽어보고 싶다. 지금 40대에 들어 읽어보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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