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인 내게 주말은.. 기껏해야 아이를 데리고 체험활동에 참여하거나 박물관, 미술관 등에 가는 것도 체력이 빠듯한데 등산이라니?!
하지만 아들이 소원이라고 하니 더 이상 못들은 척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 오늘 간다. 등산.”
등산 초보답게, 물 두병과 지갑만 달랑 가방에 넣고 아들과 함께 나섰다.
우리 동네에는 500m가 약간 안 되는 높이의 산이 있다. 집에서 산 입구까지 10분 정도인 가까운 거리이다. 그런데, 이 산의 능선이 우리 집 쪽에서는 굉장히 가파르고 조금 떨어진 다른 마을에서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은 완만하다. 처음에 뭣도 모르고 이 산을 혼자 올라갈 때, 꽤나 가파른 길과 군데군데 바위길 사이를 나무들과 로프에 의지해 기어올라가다시피 할 때 놀랐었다. “와.. 이 산 뭐지? 왜 이렇게 가파르지..”
하지만 곧, 다른 마을 쪽에서는 완만하게 올라오는 산이라는 걸 알고 나서 얼마나 혼자 약오르던지..
‘아 뭐야… 인생 같네.. 진짜.. 내 팔자 같기도 하고… 쉽게 올라가는 사람도 있는데 왜 하필 나는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거야…‘
아들은 산 입구에서부터 종알종알거리며 들떠있었다.
중간중간 발걸음을 멈추며 뒤에서 숨 차하는 나를 기다리며 격려해주기도 하고, 주변에 보이는 나무, 풀, 벌레 등에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며 거침없이 올라갔다.
산 중간쯤 올라갔을 때, 벤치에 둘이 앉아서 쉬고 있는데 어떤 60대 여자분을 만났다.
“아들이랑 등산하러 오셨나 보다. 힘내요.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요.”
너무 숨차서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처음 만난 분의 친절함에 최대한 숨을 고르며 웃으며 감사하다고 답했다.
그분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올해 정년퇴직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인들이랑 등산이나 골프를 다니는데, 이 산에도 가끔 등산하러 오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모든 것들이 작아 보이는 것이, 아등바등 살던 삶이 저렇게 작고 별 것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고 하셨던 것 같다. 아니, 좋다고 하신 게 아니라 다른 말씀을 하신 것도 같다. 나 또한 생각에 잠겨 사실 자세히 듣지 않고 반은 멍하게 들었기 때문에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그분의 말씀에 동의를 하고 그분도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시길래, 앞쪽 울타리 쪽으로 가서 경치를 구경하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가 예전에 읽은 책에서 말이야, 어떤 고민거리가 있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나를 우주로 띄워보라고 하더라. 그러면 그 우주 안의 내가 엄청 작은 존재처럼 느껴지면서, 나의 시간 나의 고민, 감정들이 엄청 작게,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고 말이야. 엄마도 가끔 힘들거나 너무 스트레스 받을때 우주에 떠있는 엄마를 상상하곤 해. 그런데 우주까지 갈 것 도 없어. 산에 올라와도 비슷한 것 같네.. 요즘에 혹시 속상한 일이나 무슨 고민 있어?”
“없는데?”
“하긴, 초등학교 5학년이 큰 고민 있을 나이는 아니지..ㅎㅎ다행이네 뭐.”
충분히 쉬었으니 슬슬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분도 같이 짐을 챙기며 동행하셨다.
그분이 아들과 이야기하는 걸 듣고, 또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걸 들으면서 그분이 아마 교감님이나 교장님이었을 것 같다는 아니 적어도 확실히 교직에 계셨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아낌없이 칭찬하실 때마다 확신이 들었다.
정년퇴직을 하셨으니,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혹시 교직에 있으시지 않으셨냐고 저도 그렇다면서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임을 밝히고 뭔가를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휙 올라왔지만 곧 가라앉혔다. 서로 그냥 가볍게 등산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게 편하지, 서로 조금 더 알게 되면 불편할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가 서로 불편하지 않은 선이겠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경기도에 있는 대형 천문대를 추천해 드렸다. 그리고 그 천문대에 가면서 들를 수 있는 바로 앞에 있는 미술관도 알려드렸다.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래 여기까지가 좋아. 서로에게.
정상에 올라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어디 있는지,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우리 동네의 이 산은 특이한 게, 정상에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몇 가지, 그리고 막걸리를 파시는 분이 계시다. 매번 뵐 때마다 감탄스러우면서 궁금하다. 이분은 대체 언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등산하시는 걸까? 우리 동네에서 오시는 건 절대 아닐 거야. 완만한 경사 쪽으로 오시겠지. 그래도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그분에게서 음료수 하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아이스크림은 아이에게 주고, 음료수는 저 멀리 풍경을 구경하시며 앉아있는 그분께 드렸다.
한사코 사양하시며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도 끝까지 드시라고 손에 쥐어드리고 돌아섰다.
모르는 사이였어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만나지 않을 분이지만 같이 산을 올라온 인연으로, 그리고 정년퇴직을 축하드리는 마음으로 이 정도는 해드리고 싶었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 아이스크림은 엄마가 어릴 때도 있었거든. 이모랑 엄마는 이 아이스크림 막대를 양손으로 이렇게 잡고 막 돌려서 먹곤 했었다? 한번 해봐 ㅎㅎ 그럼 더 맛있어.”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하더니 어느새 그렇게 두 손으로 비비면서 먹고 있다.
둘이서 멍하니 작아진 우리 마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야기했다.
“그런데 있잖아.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생선생님이 있었거든.”
“교생이 뭐야?”
“?? 학생 선생님… 교생선생님 한 번도 안 만나봤어?”
“응”
“아.. 선생님 되려고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잠깐 학교에 와서 실습하는 그런 건데.. 여하튼, 엄마 고등학생일 때 경제학과 교생선생님이 오셨었거든. 그 선생님이 떠나시던 날에 인사하면서 우리 반에 들려주신 노래가 있어.”
전인권의 봉우리.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노래는 전인권 씨가 부른 봉우리였다. 이 노래를 들려주실 때 내가 고2였나 고3이어서 심리적 압박감이 크던 때라 그런지 친구들 몇몇이 노래를 들으며 훌쩍이던 게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거의 20년 전이니까…하지만 이 노래는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 노래로 유추해 보건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도 대충 알 듯하다.
그 이후로 이 노래가 가끔 기억날 때면 찾아서 듣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 꽤 자주 듣게 된다.
찾아 듣다 보니 이 노래를 김민기 씨가 먼저 불렀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노래는 전인권 씨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둘 다 즐겨 듣는다.
아들이랑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해서 우리 앞에 두고 아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다.
“이런 노래도 있어?”
“응.. 댄스나 발라드, 힙합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시를 읊는 듯한 노래도 있지..”
6분 정도 되는 긴 노래를 듣는 동안, 아들이 가사를 듣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양손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잡고 빙빙 돌리며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노래를 가만히 들었다. 봉우리 위에 서서.
어릴 때 들었을 때에도 뭔가 마음에 와닿는 가사였는데, 나이를 들고 들으니 그 깊이가 더 느껴진다. 그리고 공감도 간다.
그래.. 내 앞의 봉우리가 전부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뒤에 더 큰 산들이 있었지..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가사를 들으며 새삼, 눈물이 살짝 나왔다. 아들을 쳐다보니, 시선을 멀리 두고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돌려가며 먹고 있었다.
같이 노래를 들은 건지 혼자 다른 생각에 잠긴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산 정상에 서서 이 노래를 같이 조용히 듣고 있던 그 순간이 나에겐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아들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냥 지나가는 일상이었을까?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