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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Apr 11. 2024

6.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나요?

마태복음 6장 12절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집안끼리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불릴만한 일들도 없고 가정의 패망의 선봉장이 된 사람도 딱히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주치기 싫습니다. 가슴이 작은 분노로 차오릅니다.

미움은 나를 죽입니다. 나의 삶을 갉아먹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결정하고 걸어갈 때 발을 거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문제에 대해 훼방을 놓고 수군거리며 옴짝달싹 못하게 삶의 궤적을 옭아맵니다. 그들의 의견으로 우린 다시 큰마음먹고 결정한 내용을 뒤집고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고분고분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록 또 애완동물처럼 세상의 기준대로 또 멈춥니다. 도전할 마음이 또 사라집니다. “그래 무슨 하늘의 뜻이고 부르심이고 도전이냐 그냥 살던 대로 살자” 소소한 관계와 일상의 만남이 하늘의 뜻에서 우리를 멀리 떨어뜨립니다.

용서는 제자로 살기 위해,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선포되는 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평가와 관계를 통한 공격입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고 미움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받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일은 용서를 바탕으로 한 감사를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승리의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길을 내셨습니다. 용서입니다.

  

1. 우리에게 죄 지은자가 누구죠?

우리에게 죄지은 자가 누구입니까?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한자, 나를 학대한 자, 나의 돈을 떼먹은 자, 나와 가족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 자 등 나의 삶을 헤집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으로 누가 나에게 왜 죄를 지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죄를 실제로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을 못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애꿎은 옆에 있던 사람과의 관계만 더 해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문제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장사를 하시던 분이 말도 안 되는 고객의 리뷰나 요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가끔 듣습니다. 뭔 자살까지?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자신들 하인처럼 대하는 일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내가 차라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되겠다”라는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압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황 가운데 목숨을 끊는 선생님들이나 회사원들 쌓인 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하기 전에 거대한 파도처럼 상황이 몰려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책임감이 한데 뒤엉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벗어날 방법은 극복한 경험이 있는 멘토링의 위로와 격려와 대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조직은 버티라고만 하고 출구를 찾아 대피해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개인의 나약함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8-21절입니다.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 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올무에 걸려들게 하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세금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형상과 이 글은 누구의 것이냐? 물으셨습니다. 누가 이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하는가? 누가 이 돈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인가? 당연히 동전에 자신을 표시한 사람이죠. 그게 발행권이니까요.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렇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면 된다.” 단순히 세금 관련된 문제가 아닌 본질이 무엇인가? 찾아야 합니다.

대상과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경험자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만약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이 안된다면 모든 책임을 버리고 일단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자신을 벼랑 끝에서 밀어서 죽이려고 했을 때 피하셨습니다.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야만 분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지치고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과 상황을 명확하게 한 다음 피해야 합니다. “먹고살아야 하는데요?” 목숨을 잃는 것보다 일단 피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책임지느라 고생했고 이렇게 지쳐있는 만큼 충분히 고생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일단 피하십시오. 예수님도 피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니 일단 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피성 제도로 만드셨습니다.

2. 대면이 용서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얼굴 보고 미안하다고 해”라고 해야 용서가 된다는 문화입니다. 용서를 당사자가 한다고 해서 여론이 당사자가 되어 서로 싸웁니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느니 당사자는 빠지고 자기들끼리 싸웁니다. 우리의 인생을 멍들게 하는 것은 당사자와의 관계와 계속 회자되어 소문이 되고 수군거리는 아우성들입니다. 남 말 하기 좋아하고 남의 불행이 가장 재미있고 통쾌한 일입니다. 죄의 본성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용서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들은 여전히 비웃고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드리며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갈기갈기 찢은 사람이 누군지 명확해졌다면 그를 주님께 드리고 그를 용서한다고 고백하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던 방법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십자가에 그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아무도 우리 곁에 있지 않을 때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용서의 방법입니다.

피한 다음 마음을 추스르고 당한 상처를 곱씹으며 주님께 드리십시오, 죄의 흔적이 나의 삶을 헝클어뜨리고 할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를 도구 삼아 짓밟고 조롱한 그들의 죄를 사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아니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의 죄의 흔적을 삶에서 지워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피해야 하나요?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나의 삶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피하고 그들의 죄의 흔적을 용서를 통해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책임 지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새로운 곳에서 먹여 살리실 것이니 살아야 합니다.

대면하면 또 상처받습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죄는 누군가를 반드시 죽이려고 합니다. 그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로 피하셔야 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참 안식처가 주님의 품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면은 용서가 아니라 회복 후 성장 한 내가 그들과 맞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하면 됩니다. 

야곱 지도에서 만나기 무서워 벌벌 떨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겨우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서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사실 장자권만 놓고 본다면 에서가 피해자입니다.

3.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법을 깨닫다.

죄의 공습에서 벗어나 십자가 그늘 아래 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고 마음이 무너진 일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길을 가신 거였구나… “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장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은 돈을 낸 만큼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접을 받는다는 개념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지불한 값보다 음식이 맛있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누군가는 하인처럼 부려야 돈을 낸 값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산할 때 카드나 지폐를 툭 던지는 사람부터 반말로 부려먹는 사람들, 꼬투리를 잡아서 리뷰 테러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 와 죄송합니다, 다시 해드리겠습니다.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두 마디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핵심은 너무 감정을 섞으면 나만 괴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나고 다 때려치워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저한테만 손해더라는 것이죠. 감정을 배제하고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고 내가 돈 내고 갔을 때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을까를 생각하니 많은 문제가 풀렸습니다.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잘라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돈이 주인인 세계에서 돈을 내는 사람이면 무슨 요구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된다고 처음부터 제시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나에게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감정을 조금 제거하면 실마리가 풀립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진상을 부려도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이것입니다. 장사를 하고 나서부터 겸손을 조금 익힐 수 있었고 할 말은 해야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된다는 것도 배웠으며 감정적인 대응은 언제나 후회만 낳는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용서는 결단이자 단절입니다. 누군가의 흔적이 내 삶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끊어내는 결단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매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반복되고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 사슬들을 날마다 끊어내고 오늘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잘 소화시키며 하루를 성장의 밑거름으로 살 수 있을까를 찾아야 합니다.

시작은 용서이며 예수께서 하신 방식을 배워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6절입니다.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게 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권력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예수님은 신경 쓰거나 상처받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살인 위협을 받고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지언정 자신을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베드로가 붙잡아도 십자가로 가시는 길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용서와 결단의 길도 동일합니다.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흔들리는 모든 도전들을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언제나 해결의 실마리를 허락합니다.

감정으로 우리를 흔들어대는 모든 도전들을 십자가에 올려드리고 용서하고 그들의 죄의 흔적들이 삶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해 내 삶을 좌지우지 못하게 단호하게 명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모두 드립니다. 제 안의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삶을 할퀸 그 사람, 그 사건을 드립니다. 주의 거룩하신 순종의 보혈, 대속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옵소서”

맺음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용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죄의 사슬을 끊어내는 결단도 배웁니다. 모두 십자가의 헌신으로 이것이 완성되어 삶의 문을 여는 빛이 된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든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우리 은혜교회는 용서와 기쁨과 환희의 제자 공동체입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기를 소망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세상의 도전을 용서의 결단을 통해 승리하며 전진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삶에 흘러넘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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