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라톤 Apr 15. 2024

시험에 든다고? 시험은 보는거 아냐?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시험.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단어는 우리를 쫓아다닙니다. 특별히 대한민국은 시험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험은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또는 그런 상황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진급, 진학을 위해 시험을 보지 않으면 원서를 제출할 수도 없고 능력을 검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앞의 두 구절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에서 당면하는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대한 기도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삶 가운데 허락하시는 비밀을 풀어가는 여정에서 당면하는 환경과 사람들에게 넘어져 하나님의 뜻을 엎어버리고 마는, 시험의 상황에서 무너지는 것을 시험에 든다고 표현하십니다.

끝이 있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안다면 우린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시험에 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을 모르고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멈추고 넘어진 채 머물러버립니다.

시험에 드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감사, 용서, 삶에 대한 도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인생을 향한 긍정, 용기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대신 의심과 불평불만, 정죄와 판단이 자리 잡고 용기 대신 걱정 근심이 삶을 뒤덮습니다. 눈은 아래를 향하고 어깨는 축 처지며 한숨과 좌절의 단어만 입에 가득해지고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 상태에 빠지는 순간 늪에 빠진 것과 같은 깊은 낙심과 좌절과 우울감이 삶을 뒤덮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매일 이 상태에 빠지는 일에 너무 익숙합니다. 익숙해져서 아예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시간이 많습니다. 대적 마귀는 너무도 그런 상태에 빠져서 우리가 허우적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하늘의 뜻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둬버리는 것처럼 그들에게 기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상황을 경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시험 앞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시험에 든다"는 어떤 의미입니까? 왜 예수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시험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다만 시험에 사로잡힐 것인가? 시험을 이기고 극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그 태도를 만드는 것은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 36-39절입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께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을 때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향유 옥합의 주인공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살펴볼까요? 1)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2)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3)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이 광경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신을 만지이 여자가 누군지 내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죄인인 것을 알 것이다.” 이미 그는 그 여인이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 여인은 그의 죄로 인해 동네 공동체 안에 이미 소문이 퍼져있던 것 같죠?

그녀가 예수님이 자신의 동네에, 그것도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어떤 고민을 했을까요? 


"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여 내 죄를 씻고 싶다.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지도 않는 이 죄의 올무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릴 것이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너무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난 메시아 그리스도를 꼭 만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1) 예수님을 만나자

2) 예수님을 붙잡고 회개하자.

3) 예수님께 나의 가장 소중한 선물을 드리자

마치 혈루증 걸린 여인이 치료를 받았듯 그녀는 사람들의 두려운 시선을 뚫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참된 회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죄는 우리를 선택의 상황에서 안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바로 죄의 올무에 빠지는 것, 그리고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라는 사실 질문을 가장한 한탄이죠. 같은 상황에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상황은 없을까?” “무엇이 나를 지금 붙잡고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가?”

제가 요즘 던지고 있는 질문은 “왜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안 올까? 여기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온라인 시대에 네이버 지도 나 인스타그램을 활성화시키고 함께 교제하고 삶을 나누는 것을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닐까?”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단 하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동안 말씀을 너무 소홀하게, 구역 성경공부모임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본질과 알리는 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유일한 방법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예수님께 나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삶을 맡겨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걸어가 향유 옥합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삶이 올무에 걸린 채로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까? 그런 삶이 당연합니까? 그렇다면 본질에서 내가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2. 올무의 본질은 나 자신의 습관이다.

올무의 본질은 자신의 습관입니다. 습관은 우리를 좋은 땅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함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큰 문제는 습관이기 때문에 함정의 늪으로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의문을 제기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굴레를 당연하게 여기며 삽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데 정작 한 번도 장점을 누린 적조차 없는 것조차 모릅니다.

누가복음 8장 11-15절입니다.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길가, 바위, 가시떨기 우리를 옭아 메고 있는 습관입니다. 사람은 조금 해보고 안 하면 멈춰돌아갑니다. 관성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뇌가 그렇게 변화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 모태신앙이 축복일까요? 화끈하게 타오르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삶에 신앙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삶도 반드시 주님 앞에 향유 옥합 여인과 같이 결단의 때가 찾아옵니다. 아예 신앙이 없던 분들은 예수 믿기가 힘듭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죄의 늪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런 주님께서 믿는 남편, 믿는 아내를 만나게 하셔서 강제로라도 끌어당기십니다.

이제 우리의 편에서 생각해 볼까요? 길가 밭이라면 말씀을 어떻게 하면 빼앗기지 않을까? 바위라면 시련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돌아서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가시밭이라면 돈과 걱정의 문제에서 어떻게 주께서 책임 지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는 삶을 누릴까?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이 뭐라고 하십니까? 착하고 좋은 마음-자신의 상황을 알고 빠져나올 방법을 찾는 마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말씀을 삶에 새기는 습관을 통해 뿌리내리는 여정을 말합니다. 인내-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결실-기다려 버티면서 올바른 습관의 열매를 맛 보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바로 매번 나의 삶을 가로막는 특정 습관,, 특정 영역에의 약점을 극복하는 도전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본질과 알림을 어떻게 하면 나의 삶에 장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말씀 공동체입니다. 말씀을 뿌리내리는 전교회적인 습관을 만드는 것이 본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소그룹 성경공부모임, 말씀묵상 모임으로 본질을 강화하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동시에 외부로의 알림은 당회에서 나눈 것처럼 오프라인에서는 교회 공간을 사업의 형태로 외부에 알리고, 온라인에서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홍보하는 것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파고드는 삶을 살아왔기에 매우 어려운 도전이 바로 마케팅이라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마케팅이라는 용어를 상품 판매하는 장사꾼들의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하는 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질과 존재를 외부에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말씀을 알고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질문은 우리를 옭아매던 잘못된 편견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남 탓하고 다시 원상 복귀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를 과거의 올무에서 빠져나오도록 깨달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사실 말씀으로, 도전으로 몸부림치며 삶을 깨워야 우린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탄 마귀의 올무로 가득하고 이미 우리는 습관으로 그런 올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즐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워야 합니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본질을 깨우는 말씀으로 가능하며 결단할 때 비로소 꽃피울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34절입니다.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부담을 지우기 위해 선교지로, 뭔가 하나님의 거창한 뜻을 이루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 그의 옷을 입고 그의 길을 가도록 도전하라는 말씀이며 우리가 빠진 올무를 깨닫고 돌이켜 근심과 걱정이 아닌 부르심에 반응하라는 도전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말씀을 읽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사소한 일부터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기뻐합시다. 하나님의 소망을 붙잡을 때 우리는 시험에서 매일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전 06화 6.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