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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조카를 돌보는 일

by 이윤우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가 있다. 나는 조카 나이 5살에 처음 만났다. 나는 3살에 한글을 읽고 썼는데 5살 조카는 한글을 읽고 쓰기는커녕 허공에 대고 색을 짖었다. 힘 빠진 눈동자를 허공에 두고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색이름을 연이어 소리쳤다. 가끔은 사물 이름을 말했는데 커피, 장난감, 핸드폰, 그런 말들이었다. 조카는 이상했다. 또래에 비해 심하게 느렸고, 아무렇게나 표정을 지었다. 말은 이어지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단어를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상한 조카는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확히는 우리 동네로 새로 이사 온 애였는데 나는 걔에게 마음이 갔다. 조카도 이상했지만 내 마음도 이상했다.


나는 조카의 한글 선생이 되었다. 조카는 ‘ ㄱ ’ 과 ‘ ㄴ ’을 읽고 쓰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나는 조카를 가르치면서 이 애는 타고 나기를 또래에 비해 느린 건 맞지만 발달 수준과 별개로 고집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를테면 ㄱ을 분명 읽고 쓸 줄 알게 되었음에도 그날그날 기분이 나빠서, 혹은 이 자리가 싫어서 ㄱ을 쓸 자리에 ㄴ을 쓴다던지, 알아볼 수 없는 선을 그어 놓는다던지, 바르게 써놓고 내가 쳐다보면 다 지워 버린다던지 하는 점에서였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르게 쓸 때까지 기다렸다. 조카는 내가 포기하나 안 하나 간이라도 보듯 ㄱ과 ㄴ을 맴돌았다. ㄱ을 쓰라면 ㄴ을 쓰고, ㄴ을 쓰라면 ㄱ을 쓰는 기행을 끊임없이 반복했고, 한 달쯤 지났을까 자신이 졌다는 듯 다음 한 달 만에 모든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됐다.


조카의 조모와 나는 조카의 정확한 병적 진단을 받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다녔는데 놀랍도록 병원마다 말이 달랐다. 자폐, 지적장애, 심하지 않은 자폐, 웬만큼 교육하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지능을 가질 수 있는 자폐, 자폐라고 보기 애매한 지점이 있음, 이렇든 저렇든 아이가 또래보다 느리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된 교육 방법을 요구하며, 부모의 대단한 관심과 공부가 필요한 일이고, 아이 본인이 특수한 지점이 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해가 되거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을 스스로 일으키지 않기 위해 정확하고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 무조건 아이를 보호해서도 안 되며, 시간이 흘러 조카를 보호할 수 있는 어른 전부 죽었다는 가정 하에, 조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밀도 있고 제대로 된 훈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정말 끔찍하게 조카를 공부했다. 나는 조카의 가족보다, 정확히는 조카에게 의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어른을 제외하고, 나 만큼이나 조카를 아는 사람은 이 땅에 없다고 자부한다. 그게 가족도 아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오늘 조카의 열번째 생일이다. 공주 옷도 사 입히고, 걸을 때마다 불이 반짝이는 샌들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주고 머리띠도 사주고 놀이동산도 데려가고 족히 30만 원을 썼다. 애 하나 키우는 데 이렇게나 큰돈이 들어가는 거면 죽었다 깨어나도 자식은 못 낳겠다고, 하지만 자식 안 낳은 셈 치고 너한테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냈다. 나는 걔만 보면 마음이 아파 죽겠다. 세상 이렇게 흉흉한데 모자라다고 손가락질 당할까 봐, 너는 깡도 있고 고집도 있고 성격 더러워서 어디서 맞고 살지는 않겠지만 너를 살펴주는 어른이 다 죽으면 어른이 다 죽었다는 이유로 네가 죽게 될까 봐. 사람이 죽는 이유가 그렇게나 허무할까 봐. 조카 태어난 날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2021년 7월 12일에 처음으로 ㄴ을 썼고
다음해 2월 21일에는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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