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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나이 Jan 12. 2023

비포 선 셋


여행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비행기는 끊었는데, 가고 싶은 도시는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평소 눈여겨보았던 도시들에 대한 책과 영화를 찾아본다. ‘아트인문학 여행’, ‘포르투갈은 블루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포르토’, ‘바르셀로나 썸머 나잇’,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등등. 그것도 부족해서 온라인에 게시된 후기들도 읽어본다. 그리고는 가고 싶었던 도시들을 쭉 펼쳐놓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가보지도 않은 그곳들에 내가 갔을 때를 눈감고 상상해 본다.


사실 ‘사는 게 내 맘 같지 않다.’ 혹은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마음을 놓게 만든 건 여행이 팔할이었다. ‘여행을 갔을 때,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겠지.’ 혹은 ‘이런 기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라는 어떠한 초 현실적인 분위기는 사실 지금부터 감히 상상을 하거나 또는 조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던 초기에는 상황과 분위기가 완벽하게 조화되는 그림을 수도 없이 그리고 또 기대하곤 했었다.


알다시피 실제로 내가 여행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나의 기대들이 채워지면 다행이건만, 대부분의 순간순간들은 나의 기대에 스스로 실망하기 부지기수였다. 여행을 하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무수한 사건들이 내 눈앞에서 갑자기 발생하고, 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이 오가는 난관을 겪기도 한다. 때로는 그 반대로 터무니없는 곳에서 귀인을 만나기도 하고, 사소한 인연이 나의 여행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의 일상에서 나를 괴롭히던 크고 작은 일, 고민, 시련들이 정말 넓디넓은 우주의 한 톨의 먼지만큼 사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런 사소한 일들에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할 때쯤부터 나의 일상을 조금은 객관화시켜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격이 유해지고 또 느슨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돌이켜 본다.


왜,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내가 올바르게 나이 들어간다고 느끼는 건, 여행 중 우연히 찾아온 시련에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세상 만물 내 맘대로 되는 건 하나 없지만, 분명 인과관계는 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넉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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