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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나이 Jun 17. 2023

저녁 9시 구엘공원

하루 내 열정을 쏟아붓은 사람들이 저녁 늦게 타파스바에 모여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나서야, 겨우 태양이 제 몫을 다 한 듯 달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도시. 대낮의 태양은 프리즘을 갓 통과한 일곱 가지 빛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도시. 뜨겁게 솟아오른 태양에 맞서 한없이 푸르른 지중해의 격동적인 파도를 가장 가까이에 품은 도시. 그러한 태양과 바다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신을 섬기고자 한 어느 괴짜 건축가에 의해 방점을 찍은 도시.


바르셀로나.


그런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이 도시는 지리한 역사 속에 공존의 질서를 구축하고 다양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찬란했지만 저물었던 한 시대를 인정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았습니다. 밤늦게 도착한 이곳의 첫인상만큼 겸손하고 포용적인 모습의 도시가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니면 어쩌면 생소한 곳에 대한 걱정이 조금 더 앞섰던 제 노파심과 불안감이었을까요. 상대적으로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따스함을 느끼게 된 것일지도요.


이 도시를 사랑할 만한 요소들은 일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과 장소를 꼽으라면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저녁 9시의 구엘공원.


바르셀로나 시내를 가로질러 서쪽의 가파른 언덕을 20여분 올라 이 공원에 다다르면, 뜨겁게도 따뜻한 이 도시를 두 눈에 차고도 넘치게 담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 콜럼버스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고 들뜬 마음으로 항해를 해올 것만 같은 넓은 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이 이 도시를 지켜주는 장엄한 광경을 한 발자욱 떨어져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저녁 9시라면 결코 저물지 않을 것만 같은 지중해의 뜨거운 심장도 구엘공원 바로 뒤편, 티비다보 언덕을 지나칠 시간입니다. 즉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태양은 강렬한 붉은빛으로 저물어가며 경외로운 신비함으로 이 도시를 휘감아 줄 시간이 된 겁니다. 그런 노을을 바라보자면, 그 누구든 찬란했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찬란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조우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라며 강요받을 것 같습니다.





이 근사함을 꿈엔들 잊을 수 없어 다시 언덕을 오르기 위한 여정 중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살결, 두 볼에 옅게 자리한 주근깨, 무심한 듯 등 뒤로 엎어놓은 몸집만 한 커다란 가방. 선글라스 뒤로 보이는 첫 모습은 아마도 가녀려 보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시내에 위치한 어느 식당을 방문했습니다. 그곳 한편에서 각 식당마다의 고유한 향이 담긴 시원한 샹그리아 한 병을 주문했습니다.


한두 잔 채워지는 향긋한 과일향과 함께 나눈 대화에서 당신을 가녀린 사람일 것이라 판단했던 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저와 생일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같은 나이이지만 실로 당신이 미래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저 보다 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화의 태도는 당찼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습니다. 행동 하나하나에는 후회보다는 깨달음을 채워갔으며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긍정적인 모습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현존하는 최고로 아름다운 건축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앞을 지납니다. 언덕을 지나쳐 힘에 부칠 때쯤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내 오르막길을 따라 걷습니다. 우리는 힘겹게 마주한 구엘공원에서 전망이 좋은 광장에 자리합니다. 해가 언덕을 지나쳐 이 도시에 한 숟갈의 신비함을 더해줄 때까지, 발아래 도시와 저 멀리 바다의 장엄함에 다시금 감탄합니다. 두 눈에 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이 장소를 어떻게든 사진으로 품어가기 위한 헛된 노력도 더해봅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8시 30분.. 35분.. 40분을 지나자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이 도시도 대자연의 신비 앞에 조금씩 빛을 잃어 갑니다. 내려다 보이는 가우디의 도시가 언덕에 비춰진 그림자와 함께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붉은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아, 이보다 아름다운 석양을 또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요. 가우디가 이 언덕을 내려다보며 했을 감탄을 지금의 저도 공감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만치 옆에서 신비함을 휘감은 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당신이, 아마도 이 도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방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태양에 그을린 살결도, 두 볼에 자연스레 자리한 옅은 보조개가 건강함의 상징이라 말하던 모습도, 이 동네의 주민 마냥 사진을 찍어달라던 주문사항도. 저녁 9시의 구엘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석양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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