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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ler Dec 15. 2020

추억의 대리님 - 직급 탈출하셨나요?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 살기_09

입사한지 만 4년을 채우고 대리 진급을 앞둔 해였다. 일반적으로 대리 진급에 누락되는 일은 없었고 우리 동기들은 첫 회사 타이틀을 얻을 생각에 약간은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인사발표에 내 이름은 없었다.


그 해는 전년도 M&A에 따라 인수한 회사와 인수된 회사의 사규를 통합하던 시기였다.

내가 입사한 회사는 대리 진급에 남녀불문 만4년이었고, 합병한 회사는 군미필 여성 사원의 대리 진급에는 3년이 더 필요했다. 

회사는 여성에게 3년이 더 필요한 그 사규를 선택했고, 그 해에 해당되는 여성 사원은 내가 유일했고, 동기들 중 혼자 누락되었다. 

고문관으로 소문났던 동기도 승진한 판국에, 사원으로 드물게 높은 고과도 받았던 내가 탈락하자 회사는 술렁였지만, 발령을 뒤집지는 못했다. 나 하나 이슈삼기에는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등 축하받을 이와 위로 받을 이가 많았다. 그리고 여느 해와 같이 회사 앞 술집들은 북적북적했다. 승진 축하주도 마셔야 했고, 탈락 위로주도 마셔야 했으니까. 나는 술을 마셨는지, 얼마나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존심도 상하고, 회사의 조처에 실망한 나는 사표를 쓰기로 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같이 화를 내줄 거라 생각했던 나의 가족들은 의외로 침착하게 나를 말렸다. 아빠는 회사가 현재 과도기이니 좀 있어보라고 하는 전형적인 상사와 같은 말을 했고 나는 다시 한 번 실망했지만, 대안도 없었다. 평범한 사무직이 이 나이에 신입으로 갈 수도 없었고, 이직을 해도 대리를 달고 해야할 것임은 아는 연차였다. 약은 올랐지만 딱히 행동으로 뭔가 보여줄 수 있을 정도도 못되는 나는 내색도 못하고 출근하며 시간을 보냈고, 꼭 나때문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회사는 다시 사규를 보완하여 나는 다음 해 후배들 및 6,7년차 여성 선배들과 함께 진급했다. 


다 지나간 지금에야 그까짓 대리 승진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조직 생활 끝까지 가봐야 안다고 말해주겠지만 그리고 그 때 그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나에겐 아직까지 옹이처럼 남아있는 기억이다. 


매년 서로 다른 이유로 억울한 사람이 한 두명은 생기는 인사발령이 이어지던 어느 날, 회사는 혁신적인 조직개편과 함께 팀 체제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도록 모든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직제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팀장과 임원 외에는 모두 이름만 적힌 새 명함이 지급되었고, 김부장님, 이대리 등의 호칭은 금지되었다. 이미 영어 이름이 있는 젊은 직원들끼리는 금새 적응했지만, 머리 희끗희끗한 부장님의 이름-그것이 이니셜이라도-을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인사발령일도 아닌데 회사앞 술집들은 한 해 누락이 아닌 기회자체가 날아가버린 이들로 북적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회사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한 채였다. 


일부 용자들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수평조직 문화가 느릿느릿 전파되는 중에 인사팀이 먼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재직 증명서 신청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은행 제출용이라고 하며, 예전 직급을 명기해달라고 한단다. 

그랬다. 부장님과 팀원의 대출한도는 천지차이였다. 돈이 걸린 문제였고, 직원들은 가족들에게 능력없는 가장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했다. 부모님 직업과 직급을 학교에 제출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영업팀장들이 SOS를 쳤다. 거래처들이 팀원들만 가서 명함을 내밀면 의사 결정권자와 함께 오라며, 혹은 본인과 비슷한 직급의 사람을 만나야겠다며 안만나준다는 거였다. 우리 회사의 조직을 설명해도 그쪽 담당자도 내부 보고가 곤란하다 하니, 팀장 혼자 영업하게 생겼다며 중간 직급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이 이어졌다. 


내부 서열타파를 위한 기업문화 창출에 문제가 외부로부터 생기자 회사에서도 난감해졌다. 한번 발표한 것을 뒤집으면 안된다는 강경파와, 영업에 권한을 더 주자는 파, 내근직도 승진기회가 없어 직원들의 의욕이 없어진다는 파, 현장직들은 그대로 둔 채 사무직들만 수평조직이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파 등등 누구 하나 틀린 말이 없어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회사는 결국 자율이라는 이름하에 어느 정도 조직별 선택권을 주고 가장 기본 조직 구조만 관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오만가지 명함용 타이틀들이 생겨났고 공식 인사 발령이 없으니 스스로를 XX라고 불러달라고 직접 이야기해야하는 등의 소소한 해프닝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조직원들은 큰 틀은 벗어나지 못하고 순응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 회사같은 조직들이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제는 젊은 대표들이 이끄는 또래들의 스타트업도 많아지고, 외국기업들과의 거래도 늘어나면서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담당자에게 권한을 주는 기업문화가 정착하는 듯 하다. 대기업을 포함한 큰 조직들도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수평조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조직의 효율적인 면에서는 장점이 많고, 변화가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가 열렸으며 나이와 타이틀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부작용은 훨씬 줄었다. 


그러니 방향은 맞는 것 같다. 앞으로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어제까지 같이 지내던 부장님을 오늘 직급떼고 부르기는 쉽지 않았지만, 후배들은 처음 만난 팀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조금 더 수월할 것이다. 어려운 고비는 넘은 걸까. 


여전히 우리는 내가 몇 년차인지 세어보고, 내 옆의 그 또는 그녀는 몇 년차인지 알아보고 대리-과장-차장-부장에 대입해본다. 몰래. 들키면 쿨하지 못하니까 서로 내색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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