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bler Sep 16. 2021

회장님 우리 회장님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살기 12

대기업 계열사로 처음 입사했을 때, 사장님은 저 높은 곳에 계셨다. 

최종면접에서도,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도 인자하고 유쾌하셨던 사장님.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으라 하셨지만, 그것은 언제 밥 한 번 먹자 라는 사회적 언어였다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비밀이었다. 


출근 후 회장님과 계열사 사장님들이 계시다는 그 층은 엘리베이터에서 숫자로만 보았을 뿐, 한번 가보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서는 기회가 있다면 고개라도 빼보련만, 어느 재벌기업 건물을 가도 회장실이 제일 높은 층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긴 프로젝트 후에 우리 층의 제일 높은 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신발을 제대로 신고 결재서류를 들고 나서는 날엔 모두가 긴장했다. 근처라면 눈치라도 보련만, 우리는 막연히 기다릴 뿐이었다. 2인자가 용기 내어 비서에게 전화해서 분위기를 묻는 일도 있었다. 센스 있는 비서인 경우에는 큰소리가 났다던지, 다른 누가 또 불려 들어갔다던지  상황을 전해주기도 했고, 까다로운 비서인 경우에는 본인은 모른다며 냉정하게 철벽을 치기도 했다. 마침내 돌아오는 그분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선배들은 희비가 엇갈렸고, (천사 같은 비서는 상황에 따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 어쨌든 긴장이 풀린 그분은 무슨 무용담을 전하듯, 다음 지시를 때로는 기분 좋게, 때로는 온갖 화풀이와 함께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서로부터 담당자 찾으신다는 전화를 받고, 보기만 했던 그 층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들어서는 순간 우리 층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와 공기가 흥미로웠다. 가운데 사장 비서들이 둥글게 바깥쪽을 향해 자리를 잡았고 꼿꼿이 앉은 그녀들의 앞에는 담당 사장님들의 방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근엄했고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가장 안쪽이 오너 회장실과 직속 비서팀 자리라고 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있는 듯, 내 깜냥으로는 그 앞을 지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날의 사장님은 여전히 온화하셨으며 멋진 격려로 주니어 사원의 기를 한 껏 살려주셨다. 

부장님의 닦달이 반 이상은 사장님의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사장님들도 오너 회장님의 산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 게 된 것도 당연히 내가 사장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직접 받고 입 한 번 떼지 못한 채 나오게 되는 즈음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기존의 층층시하 조직이었던 대기업들도 이제 납작 복숭아처럼 많이 플랫 해졌다. 수많은 사장님들은 우리와 같은 층으로 내려와서 닫혔던 방문을 열었다. 

담당자가 사장님 방에 바로 들어가는 일도 잦아졌고, 성격 급한 사장님은 내 자리를 급습하기도 한다. 회장님들도 점점 젊어졌고 수행 분위기도 조금은 달라진 느낌이었다. 


부모들의 국가재건 시대가 지나고 서구 유학파 자녀들이 경영진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대기업 입사에 반기를 든 몇몇 똘똘한 친구들이 만든 기업들이 새로운 기업문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미디어에 비친 젊은 조직에는 짙은 정장 슈트는 없었고 사장 자리도 직원들 사이에 섞여있어 방문자가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대기업의 조직력과 경제 장악력은 무시 못하지 않겠나 하는 기성세대의 우려가 무색하게 30년도 되기 전에  시기적절하게 변화했던 대기업들과 더불어 벤처 1세대들이 대기업 순위 탑 랭커에 올랐고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외면했던 오너이자 회장님이 되었다. (사장이나 회장 같은 호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어느 조직이나 대표는 있어야 하는 법)

 

 작은 조직의 의사 결정력과 유연성, 그리고 투명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실패하거나, 큰 조직에 흡수되거나, 감당 못할 속도로 조직이 커지거나 등등,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처음 시작과는 다른 조직이 되었다. 

잊혀진 기업도 안타깝지만 급성장했다고 기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급작스레 찐 살을 쳐다보는 타인의 시선은, 미안하게도, 좋지 않다.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진다.  

 

갑작스러운 인지도 상승과 여러 수치적 데이터로 사회와 정부의 시선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갑자기 늘어난 직원들은 창립멤버들과는 바로바로 손발이 맞을 리 만무하다. 이미 초창기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친구들이 아닌 임직원들은 각기 다른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합류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창립한 지 시간이 흘렀으니 세대차이의 갭도 늘었다. 끈끈한 동료애가 아닌 다른 컨센서스가 필요하지만, 성공의 동력을 내려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는 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니 고민만 늘어난다. 


물론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기업 거버넌스를 도입하고 벤처 특유의 팀워크를 강조하여 오너 1인 중심의 조직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이사회가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도록 다양성을 추구하며 실험 중이다.  미래를 한 발 앞서 본 통찰력은 사라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반짝거릴 것이고 신규 사업 구상은 계속되고 있다. 재벌 3세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환경에서 탄생한 신규 회장님들의 행보가, 사회의 조율과 적응이 궁금하다. 

스타트업 오너들이 열심히 달리고 있는 현재를 지나 30년 후에는 또 어떤 회장님들이 나오시려나. 







    






이전 14화 어느 흔한 팀장의 고백_리더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