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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ler Sep 14. 2021

쇼핑과 현질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 살기 11

엄마들의 커뮤니티에서 종종 올라오는 질문이 있다.

게임을 하던 아이가 아이템을 사달라며 소위 '현질'을 해달라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현질은 안된다는 댓글이 주루룩 달리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아직' 시작안한 엄마들의 각오 반, 이미 주도권(?)을 뺏긴 엄마들의 경험 반이다. 


지뢰찾기 수준 이상의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도 게임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불법비디오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게임=나쁜 것이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정의내렸고, 여기에 결정적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선물 사줬다고 혹은 받았다고 보여주며 자랑할 수도 없는 현질은 정말 부질없고 쓸모없는 소비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도 마찬가지로 그 때가 왔다. 

공식적으로 100% 본인이 원하는 선물을 (합의한 한도 안에서) 받을 수 있는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 중 하나 였던 것 같다. 아이는 심플한 게임 아이템을 요구했다. 엄밀히 말하면 게임 아이템을 살 수 있는 보석 같은 거였다. 플레이와 이벤트로 받을 수 있는 양으로는 원하는 아이템을 살 수 없었고, 파워업할 수 있는 아이템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던지 아이는 주저주저하면서도 한번 졸라보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지난 수년간 요구했던 레고에 비하면 1/10도 안되는 가격이긴 했지만, 게임 현질 가격은 거품낀 것 같은 레고가격보다 더 쎈 거부감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동안 레고 외에는 물욕이 없는 아이였기에, 좀 의외이기도 했다. 게임을 금지한 것도 아니고, 아이템이 없다고 게임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하지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아이에게 부응하는 척, 쿨한 엄마인 척, 게임에 들어가 둘러 보았다. 


그리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나의 싸이월드구나. 아이는 도토리가 필요하구나. 

내가 의식주만으로만 살 수 없듯이, 아이에게도 본인을 어필할 사회와 악세서리가 이미 주변에 널려있고, 

내가 이번 시즌 유행하는 스커트와 명품백이 필요하듯, 아이의 캐릭터도 나만의 시그니처이면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아이템이 필요하구나. 스스로의 맵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했구나. 


나 역시 어디 들고 나올 수도 없는 도토리를 사던 시절이 있었고, 내 룸이 어떻게 꾸며져있고, 누가 와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던가. 현실에서도 두 해만 간신히 넘기고는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가방과 로고티셔츠가 있지 않은가. 


요즘 아이들 말로 현타가 왔다. 나는 백화점에서 생존과는 무관한 아이템을 사고 커피 몇 잔, 혹은 커뮤니티로 느끼는 자기 만족뿐인 VIP까지 얼마나 남았나를 챙겨보면서 아이가 자기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허상이고 현질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엄마가 새 가방을 들고 백화점을 둘러보고 식당가에서 친구를 만나면서 쇼핑 대화하듯이

아이도 게임 맵에서 친구를 만나는데 그럴듯한 아이템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플레이도 하고 이야기 거리도  생기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널을 뛰자 헛웃음이 나왔고, 결국 엄마의 헛점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이는 아이와 합의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 사고싶을 때 사는 것이 아니라 분기별로 지정금액 내에서 구매 -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경우 이월가능. 품목은 본인 결정

* 엄마의 동의없이 개인적으로 구매 불가 

* 명절 혹은 친척들의 용돈이 생길 경우 상의하에 사용 (전액사용 금지)  


잘 모르는 분야이지만 평범한 나의 소비 패턴을 그대로 반영했다. 내가 샤넬을 사고싶다면 보너스와 다른 예산을 감안해 계획을 세워서 남편과 상의하에 살 것이고, 돈이 있다고 해서 비슷한 구두를 연달아 사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맛있는 레스토랑이라 하더라도 아무때나 계속 가지는 않을 거라는 상식적인 선에서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 잔고를 깨지 않고 생활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하는 취미활동비라는 전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아이에겐 현질이 가능하다는 것밖에 들리지 않았겠지만. 


아직 백프로 현질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의 계산법과 장착 아이템 종류는 여전히 복잡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과거 취미로 모으던 물건들은 - 엄마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 다 비슷비슷한 것이지만 - 나름 중요한 필요성과 그 안의 질서가 있었다. 

이제 손때묻은 수십수백개의 카세트테이프와 엘피 대신 멜론 스트리밍으로, 비디오테이프 대신 넷플릭스 구독으로 훨씬 쉽게 취미생활을 하는 중이다. 먼지털어 애지중지 보관할 필요도, 공간을 비워야할 필요도 없지만 멜론 앨범 정리에 한시간이 훅 지나가기도 하는 걸 보면, 이미 나에게도 온라인 현질템이 있는 셈이다. 


아이는 주어진 룰안에서 요령껏 럭셔리 아이템도 중간중간 섞어가며 현질 중이고, 친구와 이모티콘 생일선물도 주고받으며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다. 

그리고 고백컨대 나도 아이와의 합의 이후에 내 핸드폰에 숨어있는 모바일 게임에 보석을 채워 넣어보았다. 아이템을 골라 배경을 꾸며놓고 보는 그 행복감이란!  


점점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아들과 이제는 어느 메타버스 상에서 각자 구찌, 나이키의 쇼핑템을 걸치고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이 아는 척을 해주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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