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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ler Sep 23. 2021

올해의 차례상은 어떠셨나요

20세기에 배우고 21세기에 살기 13

드디어 추석이 끝났다. 출근하는 남편들은 오만 인상을 다 쓰지만 일상으로 복귀한 엄마들은 훨씬 편안한 날이다. 


명절과 제사에 여전히 고리타분한 친정과는 달리 시가에서는 여러 가지 모험적인 시도를 해왔다. 

사실 말로만 들어왔던 한 달 걸러 제사 지내는 집도 아니고 일 년에 명절과 조부모님 제사 2번 정도인 횟수와 노동 양은 친정엄마의 큰 손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보기에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기름 범벅 일은 일이었고, 설거지 담당일 뿐인 불량 며느리가 나서서 하던 대로 하자고 할 필요도 없을 일이었다.

그래 요즘은 많이들 간소화도 하고 바꾼다니까... 


시작은 어느 제삿날이었던 듯하다. 아버님께서는 다음 평일 제사에는 아들들만 오라고 하셨다.  

대부분 며느리들은 워킹맘이었던지라 그동안 일찍 못 오고 남편들과 저녁에 우르르 왔었다. 참여에 의미가 있었을 뿐이었던 건 사실인데 갑자기 대놓고 오지 말라 하시니 이 것이 노여움의 표시인지, 현실적인 대안인지 우리는 눈치만 보았다. 천사 같은 시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간단히 할 테니 아이 데리고 고생하지 말고 오지 말라고 해주셨다. 그 속이 어땠겠냐마는. 이렇게 아버님의 멘트와 어머님의 노동을 기반으로 쿨한 시부모님이 탄생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에서 자란 딸은 이것조차도 이상하고, 제사의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보이지만, 보수의 극치 아버지와 며느리의 도리에 집착하는 엄마를 둔 딸은 이런 신선한 제안에 대해서 딜레마에 빠진다. 언제나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반항할 것인지, 아니면 보고 배운 대로 할 것인지 사이에서 항상 어렵게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다음 제사 날이 다가오니 남편이 툭 내뱉었다. 

오는 수요일에 제사야. 


나는 한참 고민했다. 그는 왜 수요일 제사이니 본가 들렀다 오겠다 라는 말끔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가! 

응~ 잘 다녀와~라고 쿨하게 응대했어야 했는데 한 발 늦었다. 내 스스로가 자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남편인들 어땠겠는가. 그동안의 루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다녀오겠다 하자니 이게 맞나 싶고, 같이 가자 하자니 꼰대 같고... 그 당혹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내 말문도 막혔으리라.


우리도 나름 젊은 마인드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주입되었던 내용이 많았다. 남편은 장남이었고, 우리의 하나뿐인 아이, 장손은 이미 껌딱지 영유아기는 지나서 아이 핑계 댈 때도 지났고, 퇴근하고 못 갈 거리도 아니고...라는 생각이 맴도는 것은 왜인가.  굳이. 


결국 맏며느리는 제 마음 편하자고 남편과 얼굴을 내비치는 와중에 - 여전히 뒤늦게 도착해 준비는 거의 다 된 상태였다 -  아버님은 또 다른 시도를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한 번으로 합쳐서 합상을 올리자. 같이 오시면 더 좋지 않겠나.

설에는 그래도 모두 모여 조상께 절도 하고 떡국 먹고 세배를 하고, 추석은 각자 여행 갈 사람은 가고 맛있는 거 챙겨 먹어라. 


다음 명절이 돌아오자 반신반의하며 눈치 보는 아들 며느리 보란 듯이 시부모님은 추석 연휴 여행 스케줄을 짜고 떠나셨다. 

우리가 집에 있으면 아이들이 또 어째야 하나 부담된다는 멋진 멘트를 날리시고! 

역시 변화의 효과는 탑다운이 최고다. 


그러나 이 대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코로나의 시샘 때문에 부모님은 해외여행을 포기하셨고 연휴 국내 여행 예약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결국 명절 당일 집에 계시게 되었다. 그냥 모르는 척 있었으면 휴일 중 하나로 지나갔을까. 차례는 안 지내기로 했지만 이놈의 마음의 부담때문에 인사라도 하게 찾아뵙겠다고 한 것이, 그래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 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니, 명절 선물 들어온 과일을 좀 나누고 명절 반찬이라도 더한다고 한 끼 먹을 고기와 전을 가져간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많지도 않은 짐을 식탁 위에 풀자 아버님이 어머님을 불렀다. 


우리 어차피 먹을 거 차리면 절 한번 하고 먹자. 

밥과 국과 나물은 있었고, 애들 가져온 전과 고기, 과일이면 됐다. 


어머님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을 전했고, 나는 군말 없이 음식을 접시에 담고 남편-아버님의 고집에 매번 퉁박주던 아들-은 잽싸게 교자상을 폈다.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쿨하고 싶은, 신식 할아버지이고자 노력했던 아버님이 수십 년 동안 부모님께 올렸던 절을 안 하기로 했을 때 마음 한 켠에는 섭섭함과 허전함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익숙했던 역할 분담대로 움직였다. 물론 상은 훨씬 단촐했다. 큰 손 친정엄마가 봤으면 기함했을 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큰 상과 같은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상을 물림에 때맞춰 삼촌들의 전화가 울렸고, 아버님은 아들네 와서 간단히 절하고 밥 먹는다고,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동생들과 인사를 나누셨다. 


전화를 끊고 난 아버님의 표정은 개운했다. 

아유 넌 왜 왔니 라고 말로는 타박하시며 손을 꼭 잡아끌던 평일 제삿날 어머님의 얼굴처럼. 


이번 추석에도 코로나는 기승이었고, 시부모님은 댁에 계셨으며 나는 새벽에 일어나 전을 부쳐서 집을 나섰다. 한 번도 뵙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남편의 조상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20년 동안 나름 배려해주시던 시부모님을 위해서. 


아우 이래서 우리 엄마들이 투덜투덜 대면서 상을 차리는구나.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래서 여전히 명쾌하게 해결된 것은 없다. 

횟수와 양을 줄이고는 있지만 가족 간의 기대치와 역할은 여전히 다르고,

딸이 시가와 친정에 배분해야 할 정신적 육체적 역할도 아직 숙제이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본을 보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시가에 안 간 명절에 친정에 일찍 갔더니 친정 부모님과 친척들은 자주 안 보던 사위의 참여에 낯설어 허둥지둥하셨고, 나도 왜 일찍 왔는지 굳이 설명하기 바빴으며, 남편도 처가 제사 참여까지는 버거웠던 듯했다.  

아이는 친가 외가 상관없이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용돈 받는 재미일 뿐, 의미 없는 반복 습관 체득을 할 뿐이다. 제 아비가 그러했듯이. 


우리 부부가 아예 제사를 없앨 배포가 될까 싶기도 하고 그냥 작은 찻상에 뭘 올릴까 생각해본다. 여행의 유혹이 참기 어려운 긴 연휴엔 여행을 갈지도 모르겠다. 잘 찾아 날아오시리라 믿으며, 호텔 조식 뷔페에서 좋아하는 거 골라 드실 수 있는 해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 하나 둘 사라지려나. 


이번에도 전을 부쳐가야겠다 생각하다가 스스로 기가 막혔다. 

명절 음식이라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전이었다. 20년 가까이 명절마다 어머님께서 부치시던 녹두전은 먹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제일 지겨웠던 음식아닌가. 친정엄마가 서울에서 제대로 구하기 힘들다고 매번 투덜 거리던 통문어가 우리 남매들이 추억하는 제사상의 시그니처였던 것처럼.   


이래서 명절마다 집집마다 난리라는데도 꾸역꾸역 그 기본 상차림은 이어지나 보다. 버릇이 무섭다. 

나는 어떤 상을 - 여전히 상차림을 - 물려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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