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할 수 없는 여행을 앞두고
변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계획이 가지는 의미
하와이 여행이 어느 정도 확실시되고나서부터 매일같이 방문하는 카페가 생겼다. 네이버 포털에서 꽤 활발한 카페인데 회원들이 하와이 여행과 관련한 자료를 진심 어리게, 실시간에 가깝게 공유하고 있는 곳이다. 한 때, 코로나로 인해 하와이를 방문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던지라 하와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현지의 상황을 공유해주기도 하고, 여행을 위해 한국에서 하와이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출국 후기를 발 빠르게 전해주기에 꽤나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한국 기준으로 백신을 2차까지 접종한 해외발 입국자는 자가격리가 면제되었던 위드 코로나 시기에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이후에 오미크론 발발, 그리고 그즈음 확진자가 7000명으로 치솟고, 걷잡을 수 없이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방역 당국은 꽤 보수적인 선택을 했다.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 해외 입국자면 10일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고 발표한 게 12월 초. 10월, 11월부터 자가격리를 면제받고 하와이로 향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기세를 몰아 여행을 계획하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출국 날짜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나 또한 간접 멘붕이 왔다. 자가 격리 이슈로 비행기표와 숙소, 기타 예약을 취소하게 되었다는 카페 글들을 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12월 초부터 1월 6일까지 4주간 자가격리를 의무화한다는 기사 내용을 보면서,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내내 가슴 졸이며, 하지만 크게 마음 쓰지 않는 척하며 쿨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모두가 설레는 반짝반짝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의 시간이 다가올 무렵,,, 12월 29일엔 더욱 무시무시한 소식이 전해졌다. 1월 6일까지 시행하기로 한 자가격리 정책을 해제하지 않고, 2월 3일 구정 연휴 기간까지 연장하기로 했다는 것. 구정 연휴 기간의 해외 이동과 여행을 꽉 잡아보기라기라도 하겠다는 듯, 해외발 입국과 코로나의 연관성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데이터도 없이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연장되어버린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정책. 이제는 나도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구정 연휴를 끼고 앞 뒤로 조금씩 나누어 휴가를 써서 2주 정도 하와이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자가 격리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1주, 혹은 길게는 2주까지도 추가로 개인 휴가를 사용해야 할 판이었다. 하.. 정말 세상이 온 힘을 다해 이번 여행을 막는 것 같다는 덜떨어진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여행을 취소함으로써 떠안아야 할 어느 정도의 금전적 손해와 어느 정도 마음을 써가며 준비한 여행에 대한 아쉬움, 여행을 강행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상당한 연차의 소진과 오랜 부재로 인해 회사에서 느낄 부담 중에서 어떤 게 나에게 있어 피하고픈 손실일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차악은 무엇일까.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고, 또 혼자 끙끙 앓기도 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지 자책하기도 하고, 아무리 코로나라지만 이렇게 여행 한번 하기가 힘든 건지 원망감도 동시에 들었다. 이성적으로는 여행을 포기하고 맘 편히 할 일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게 좀 더 나은 답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왠지, 쉽사리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본능에 이끌리고 있었다. 어떤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일까? 미래의 나라면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경험주의적인 인간 본능은 나로 하여금 멀지 않은 과거를 되돌아보게 했다. 어떤 선택에서 다른 사람에게 눈치 보이지 않게 행동하거나, 당장 내가 누려야 할 어떠한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전 직장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로 치닫지 않기 위해서 이직을 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현실에 균열을 일으키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난 그 경험을 통해 딜레마 상황에서 어느 쪽의 선택을 한들 완벽히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며, 선택으로 인한 결과 또한 나 대신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현재 시점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든 코로나에 감염되는 일 그 자체는 심각한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이슈에서는 또다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선순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닌 외부에 우선순위를 두고 결정하는 것은 나다운 선택은 아닐 것이라고 과거의, 미래의 내가 외치는 듯했다.
그냥, 그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이렇게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이 아니면 정말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당하기로 결정했다면, 위험은 더 이상 위험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드시 처음 결정한 대로만 행동할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먼저 자가격리를 대비하여 여행 일정을 조정했다. 전체 일정을 줄여 이른 귀국 편으로 비행기 표를 바꿨다. 그리고 회사에도 미리 휴가 일정을 알렸다.
물론 앞으로 이 모든 계획에 작용될 변수는 많다. 상황이 불확실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대비할 수 없기도 하고, 선택을 한 이후에는 그에 맞게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걱정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한 때는 모든 것을 확실히 계획하기를 좋아하고, 대비가 철저했던 나였지만 인생에서 나를 바꾼 많은 사건들은 돌아보면 내 뜻대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던 것들이었다.
이런 생각의 과정을 거쳐 가볍지만은 않은 최종 결정에 이르는 동안, 눈팅하던 하와이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거칠고 축축한 날씨가 연일 이어졌다. 하와이답지 않은 날씨라고 모두가 이야기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화창한 날씨와 파란 바다, 찬란한 무지개가 시그니쳐인 곳이기에 많은 것을 감수하고 여행을 가 있는 사람들조차도 조금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비가 내린 직후에야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와이에서 자주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비가 자주 오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내가 그곳에 다다를 쯤에도 흐릿한 안개와 구름이 가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지 않다며 우울해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를 참 싫어한다.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만큼은 스스로가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결정하고 그 결과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놓치기 쉽다.
난 준비할 수 없는 여행을 준비하기로 선택했다. 선택지는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변수가 닥치더라도 실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