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람, 그 햇빛, 그 온도와 공기
느낄 수 있었다.
공항에 내려 짐을 찾으러 baggage claim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여긴 공기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공항 내부를 일정한 온도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겠지만, 그걸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고 곧장 EXIT 문이 있는 퇴장이 빠른 구조, 내가 알던 여느 공항과는 조금 달랐다.
문을 열고 나오니 이건 정말.. 완전 딴 세상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도시에서 출발해 8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길지 않은 비행시간이었지만, 찌뿌드드해진 내 몸의 모든 감각을 한 번에 녹아내리게 하는 장면들을 만났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별 것 아닌 풍경들일지도 모를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먼지 없는 파아란 하늘, 바람에 살랑거리는 야자수 잎, 코 끝에 닿는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나는 공기. 몇 년 간 꾹꾹 참고 마스크 속에서 참아온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후우우우....."
하, 대체 공항 근처에서부터 이렇게 좋을 일인가.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뗘지는 나 스스로가 우스웠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오랜만에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온 티가 너무 나는 것 같았다.
하와이에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곧바로 이웃 섬인 빅아일랜드로 떠날 여정이었기에, 이제 환승을 위해 터미널에서 멍하니 기다리는 일이 남았다. 시간은 내가 서울에서 지나쳐온 오전 10시를 다시 마주해 있었고, 따끈따끈한 바깥공기와는 다르게 터미널 안은 오히려 에어컨 때문에 너무 추웠다. 여행의 유일한 동반자인 남편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아니 한국에서는 바깥이 추워서 벌벌 떨다가 이젠 실내에서 벌벌 떠네."
떨놈떨(?) 인가보다. 겨울의 나라에서 온 앨리스는 에어컨이 낯설어 불만스러운 소리를 뱉어냈다. 덥다며 벗어버렸던 옷을 다시 껴입고, 스카프까지 둘둘 두른 채로 남는 시간 동안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레스토랑에서 앉아서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테이크아웃을 해서 공항 어디에서든 먹을 수 있었다. 약간의 아이러니가 있었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고향의 향기가 물씬 나는 스타벅스에서 블루베리 머핀과 햄 파니니를 샀다. 환율도 가격도 전혀 와닿지 않지만 뭐든 먹을 수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마저도 사고 나니 차례로 도착한 여행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졌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으라."는 엄마의 명언이 역시 진리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직장인 버전은 "쉴 수 있을 때 쉬라."정도 ㅎ)
스타벅스 앞에는 일정 시간에 나와서 하와이안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아저씨 두 명이 있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우연히 이들의 음악을 감상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생각했던 하와이 음악의 분위기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우쿨렐레를 들고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로 아기자기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막상 각 잡고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저씨들은 떼창으로 굉장히 고음으로 구슬픈 음색의 노래를 불렀고, 기타는 지기지기장장이었다. 한국의 트로트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곡을 하와이 버전으로 들으면 이런 음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묘한 애환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여성 분은 앞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까지 했다.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이때 나는 이미 정답을 얻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생각하고 들어온 하와이는 진짜 하와이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거나, 포장된 어떤 모습이라는 것. 이 음악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하고 무심코 넘겨버렸다.
하와이는 총 8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름 그대로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 그리고 '마우이', 호놀룰루 공항이 있는 '오아후' 이렇게 세 섬을 여행하기로 계획했다. 한국에서 직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오아후이기 때문에, 먼저 오아후로 들어온 다음 바로 국내선을 타고 빅아일랜드로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웃 섬을 먼저 돌아보고 가장 큰 도시가 있는 오아후 섬을 마지막 여행지로 둔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여행은 초반부에 가장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기 때문에 다소 힘들더라도 모험적인 스팟을 많이 도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빅아일랜드나 마우이 섬은 확실히 우리가 보통 '도시'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적극적으로 장소를 찾아다녀야 하는, 바로 모험을 필요로 하는 곳인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하나하나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예정이다.
내가 만난 하와이의 첫인상은 밝고 환한 얼굴이다. 반짝거리는 햇빛은 모든 만물에 평등하게 내리쬐었고, 어딜 가나 하와이 사람들은 알로하를 외치며 환대해준다. 이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는 혼자 다 가진 것 마냥 얄미울 정도로 좋은 기운을 내뿜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런 바이브는 어느 누가 애써서 꾸며내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서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것과, 하와이가 보여주는 자연이 그 자체로 머금고 있다는 거다. 여행 전날까지도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와 일상의 찌든 때에 절어있었던 나는 이런 과하게 자연스럽고 좋은 기운이 필요했다. 힐링이라는 단어는 꽤 고리타분해졌지만, 이곳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단어의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진실로 알게 되었다. 정말, 처음부터, 그냥- 좋았다.
실망할 것을 예상하면 실제로 실망하지 않는다는 스파이더맨 속 MJ의 대사는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나는 하와이에 대해 실망할 것을 예상할 틈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있는 그대로 실시간으로 맞닥뜨리기도 했고, 여행자의 오랜 습관대로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어느 정도 실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마음도 내려놓았었다. 그런데 하와이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막 과한 기대에 부풀게 하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항상 해가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듯이, 그렇게 주인공이자 배경으로 동행해 주었다. 언제나 자기는 이렇게 이곳을 영원히 지켜왔다는 듯이.
빅아일랜드 첫날, 긴 이동시간에 지쳐 도착한 숙소에 짐만 두고 급하게 뛰쳐나왔다. 시간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오후의 어느 애매한 시간, 하와이는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빛을 선물해주었다. 저녁 내내 그 빛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두 눈에 은은한 광경을 맘껏 펼쳐 보여 줬다.
멀지 않은 과거의 나는 하와이가 어떤 곳인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건 아마도 어느 누구라도 좋을 누군가의 상상 속 하와이가 현실로 튀어나온 순간이었을 거다.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