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캡틴 쿡 선장의 호출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제목에 쓰여진 이 지역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하와이 원주민 언어는 여행하는 내내,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정말이지 머릿속에 새겨지지가 않는 것들이었다. 카우아우, 와이콜로아, 할라울라, 호누아울라, 칼라오아...지도에 보이는 이런 이름들만 대략 적어보아도 굉장히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거나, 비슷한 음절들이 더해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영어로 표기해 놓은 이름들은 시각적으로도 잘 기억에 남지 않는 형태였으며 실제 발음과 약간 다른 경우도 많았다.
왜 이 날 저녁, 이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분명히 이곳을 가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리를 알 수 없는 외국 초행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것은 구글맵뿐이었고, 목적지를 정할 때에는 대부분 어느 정도 검증된 유명한 스팟들의 이름을 맵에 검색해본 뒤 리뷰를 조금 훑어보고 목적지로 삼곤 했었다. 이 패턴에 따라 그날의 나의 선택의 과정을 되짚어보지만 대체 어떤 검색어를 적고 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의아한 목적지로 남아 있다. 홀린 듯 찾아갔던 해변 근처는 1779년에 캡틴 쿡 선장이 배를 타고 처음 하와이 빅아일랜드 섬에 다다른 위치이며, 지금은 흰색 캡틴 쿡 선장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겨우 발견한 클루라고 한다면 과거의 나는 아마도 해 질 녘 "해변" 가까이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 느낀 당황스러움은 구글 맵이 우리를 도로 한가운데 안내해주던 순간이다. 주차장도 없고, 갓길 주차도 어려운 애매한 주택가 근처가 목적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구글 안내자는 침묵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왕복 2차선 도로 중간에 멍하니 서게 된 지프차, 그리고 그 속의 여행자 둘. 다시 목적지를 확인해보아도 그곳엔 별 다른 게 없어 보인다. 다시 차를 돌려 교차로 근처 차 몇 대가 서 있는 작은 공터 같은 갓길 공간에 차를 세운다. 차가 몇 대 있는 거 보니 이 근처가 맞긴 한 것 같은데... 표지판도 안내하는 화살표도 없는 도로 위.
"일단 여기 세우고 내려보자."
아직은 용기가 가상한 얇고 하늘하늘한 로브 차림의 여자와, 아무 생각 없이 쪼리를 신고 단짝을 따라온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둘은 두리번거리다가 조심히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길을 따라 구글맵이 찍어준 목적지 근처로 걸어가 보니, 풀숲인지 잔디밭인지 모르는 공터를 끼고 있는 주택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살짝 아래로 경사진 길이 보였다. 주택가가 공터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무단 침입에는 총을 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에 비해 너무나 차분한 팻말이 있었다. 여기는 아니다 싶어 두 사람은 돌아 나온다. 처음에 봤던 경사진 길로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은 선택에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무지한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지금 바닷가 해변으로 향하고 있는데 웬 숲이 나오는 거지?"
5분가량 걸은 뒤에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잘 모르겠어. 인터넷도 잘 안 터지네. 지도에 우리 위치가 안 보여. "
저벅 저벅 저벅. 풀 밟히는 소리만 오래도록 들렸다.
가득한 풀 사이로 나 있는 외길을 한 방향으로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다르게 없었다.
그들이 걸어가면서 만난 여행자들은 이 두 초보 여행자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등산복 차림에 지팡이를 양손에 들고 있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반대편 출발점에서 걸어오기 시작해서 두 사람이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외길에서 마주친 여행자들은 미국인답게 그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미소를 띠면서 여유롭게 길을 비켜주기도 했다. 세 번째 무리를 마주쳤을 때였다.
"Hi, 이 길이 해변으로 가는 길이 맞나요?"
"네 맞아요. 근데 끝까지 가 닿으려면 꽤 많이 멀어요."
"얼마나 걸려요?"
"편도로 45분 정도일걸요?"
"네? 뭐라고요????"
그들은 이제 겨우 20분 정도 걸었을 뿐이었다. 딱 봐도 쪼렙 같아 보이는 차림의 그들에게 앞서 온 여행자는 훈수라도 두듯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여기는 해가 지기 전에 무조건 돌아와야 하는 코스이니까, 지금 출발해서 가고 있는 거라면 위험할 수 있으니, 반드시 어두워지기 전까지 돌아오거나 랜턴을 챙기라고.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고맙다는 인사로 지나쳤지만, 이 여정을 지속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생길 뻔했다. 마빈 박사 같은 얼굴을 한 남자 여행자가 한 말은 진짜였을까? 이미 해는 조금씩 기울어 가는데 여기서 멈춰야 할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일단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걷고 다시 그대로 돌아오자. 어차피 길을 잃지는 않을 것 같으니,라고 여자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 본다.
저벅, 저벅, 저벅..
또다시 걸음 소리만 두 사람의 귀를 채운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듯하는 풀들에 긁혀가며, 그 풀들을 파헤쳐가며 계속 똑같이 생긴 것 같은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다. 무념무상. 걷기만 하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불과 이틀 전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지금 이 순간, 몸에 지끈하게 뿜어져 나오는 땀이 낯설고 새롭게 느껴진다.
열심히 걷고 걸어 딛고 선 땅의 고도가 많이 낮아졌다. 운동화는 신었으나 양말을 신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 해변 산책을 생각하며 가볍게 신은 쪼리는 후회에 잠긴다. 발가락은 아파오고, 꺼내어 보지 않아도 양 바깥쪽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을 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여기까지 왔는 데 포기할 순 없어. 목적지가 보이지도 않지만 투지까지 놓아버린다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나 보다.
계속 이어지는 풀숲 트레킹에 갑자기 뒤에서 "푸드덕"하는 새보다는 무겁고 큰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혹시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들개 라든가, 멧돼지 같은 동물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주 얇고 높게 쳐진 철조망만 보일 뿐이었다.
'설마... ㅎ 아니겠지. 여기서 야생동물에게 변을 당하면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사실 그 걱정은 큰 의미가 없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형이 살짝 변화한 듯, 화산암이 가득 보이는 지점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이제 해탈한 심정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해안선까지 다다르기엔 시간과 체력과 건강한 발가락이 부족했다. 저 --- 멀리 아래쪽에는 바닷물이 살짝 보였다. 돌 위에 앉아 패배를 인정해야 하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여자와 남자. 마실 물이나 먹을 식량조차 없었기에 차라리 마음은 가벼웠다. 더 이상 마주오는 여행자도 없었다.
그러던 찰나, 남자가 외친다.
"저기 봐!"
"우와....."
여자와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을 일몰의 빛이 채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람조차 한 조각 불지 않았다. 공기도 멈춘 듯 조용했다.
그냥,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졌다. 물집이 잡히다가 살갗이 조금 떨어져 나간 발가락도, 터지면 끝장인 조리도, 물이 마시고 싶은 갈증도, 찐득거리는 몸의 감촉도. 다 상관없게 되었다. 이 순간이 좋아져 버렸다.
물결은 너무나 잔잔했고, 빛은 바닷물 표면에 빛으로 그림을 그려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물감으로 말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는데, 여자는 갑자기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딱딱한 돌 위에 앉아 한참 이 예술을 흠모했다. 남자와 여자 중 어느 누구도 귀환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어려운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텅 비어 있던 마음이 풍경으로 가득 찼다. 이 순간은 사진으로 찍어도 남길 수 없고 언어로도 모두 다 담길 수 없어서 영원히 그곳에만 있는 걸 거다. 이 날은 홀린 듯,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캡틴 쿡 선장은 이 아래쪽 해변에 다다랐을 때 처음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았지만 곧 싸움이 벌어져 선원 4명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생각보다 끔찍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캡틴 쿡 선장도 이 일몰을 이곳에 서서 봤을까? 혹시 그도 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