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다
하와이의 대표적 이미지라고 하면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푸르게 펼쳐진 바다와 해변, 그리고 두려움 없이 파도 위를 거니는 서핑 보드 위의 젊은이들. 우울함이라고는 1도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장면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뭐든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배우기를 즐기는 성격이기에, 원래의 나라면 이번 하와이 여행에서 하루 정도는 서핑을 배우겠다고 혈안이었을 것 같다. 12년 전 그날의 기억만 없었다면.
잠깐 2010년의 나로 돌아가서 그때 그 장면을 재생해 본다. 뉴질랜드 교환학생 중이던 그때, 하루는 학교 GYM 게시판에 서핑 강습 공지가 떴다. 굉장히 저렴한 비용으로 서핑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도전 정신이 강했던 나는 고민 없이 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 교내 학생들을 10명 정도 되는 모아 함께 버스를 타고 비치 쪽으로 떠나는 나름 원정 수업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역시 비를 몰고 다니는 나였다.) 혹시나 비 때문에 강습이 취소될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집합 장소에 가보니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했다. 우천에는 야외 활동을 거의 포기하는 한국 문화와는 참 다르다고 생각이 들었다. 비는 잦아들 생각이 없었고, 오늘의 목적지는 파도가 강하기로 유명하다는 '피아 비치'라고 했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는 거 보면, 내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날의 기억이 그마만큼 강렬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일 게다. 함께 동행하는 학생들 중에는 이미 서핑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친구들도 있었고, 피아 비치라는 이름을 들으니 환호하는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왜?) 지금 생각하니 제대로 한번 미치게 파도를 타보고 싶었던 친구들이었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벙벙한 서핑 1일 차 소녀는 30분이 채 안 되는 기초 서핑 강습을 받고 바다에 던져졌다. 전신 서핑 슈트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바닷물은 차가웠고, 비바람은 세게 몰아쳤다.
'원래 이렇게 시작하는 건가?'
파도가 꽤나 세서 엎드린 펭귄 자세로 물을 미는 거조차 쉽지 않은 상황, 용기를 내어 첫 파도에 몸을 실어본 순간. 그 파도는 나를 혼쭐 내주고 싶었나 보다. 눈 깜짝할 사이 서핑 보드가 뒤집혀 내 코 정중앙을 가격했고, 나는 거의 순간적으로 반기절 상태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가 얼얼하고 아팠다. 부러졌나 싶을 정도로 코가 즉각적으로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으니 내 얼굴을 확인할 수조차 없어 옆에 잡히는 아무나에게 내 코 괜찮은 거냐고, 부러진 거 아니냐고 연신 물어봤던 처절한 그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 그녀의 대답은
"It's just swollen up a little bit."
차로 겨우겨우 돌아와 거울을 확인하니, 세상에.. 코가 코끼리 코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 정도가 a little bit이라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계기로 외국인들의 안전 불감증에 대해 아주 선명하게 각인이 되었던 것 같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야 한다!)
결국 내 서핑은 1차 시도만에 부상을 입고 허탈하게 끝났고, 코만 된통 다친 채로 돌아와 병원 예약을 2주 동안 기다리다가 자연 치유가 되었다. (또 한 번, 뉴질랜드의 응급 의료 체계에 대해 다시 한번 각인이 되었다. 타지에서는 안 아픈 게 좋다!)
그렇다. 이것이 부끄럽고 아프고 초라한 내 서핑의 기억이다. 정말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트라우마가 꽤 컸는지 서핑보드를 봐도 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돼버린 것이다. 서핑이라고 하면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이제 다가갈 수 없게 된 영역이 된 것 같아 슬프기도 하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하와이의 바다를 만끽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이기에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다른 옵션을 기꺼이 선택하기로 했다. 서핑을 할 수 없다면 부기 보드라고 해서 크기가 조금 더 작은 형태로 그 위에 엎드려 파도를 타며 놀 수 있는 도구로 맘을 달랠 수도 있고, 스노클링 기어를 착용하면 꽤나 쾌적하게 바다에서 놀 수 있다. 부기 보드는 파도가 치는 어떤 해변에서건 가지고 놀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스노클링을 하기로 했다. 빅아일랜드 섬에서는 캡틴 쿡 (직전 글에서 소개한 그 캡틴 쿡... 근처가 맞다.) 스노클링 포인트를 비롯해 유명한 스노클링 포인트들이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발짝만 걸어가면 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는 "투 스텝" 스노클링 포인트로 향했다. 오전 시간이었지만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투 스텝 스노클링 포인트는 바다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동시에, 정말 자연과의 경계가 없어 보였다. 현무암 같은 화산석이 넓게 깔려 있고, 그 돌 위에 서서 바로 바다로 뛰어들면 되는 곳이었다.
투스텝이라는 이름답게, 사람들은 사진에서 보이는 끝자락 쪽 돌 위에 서 있다가 하나 둘 슝슝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갑자기 공포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파도가 세게 밀려오기도 하고,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물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서 호흡이 어렵거나 빠져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머리가 알고 있지만, 정말 깊은 바다로 갑자기 들어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몸이 허우적대며 느끼게 되는 이상한 공포감이 있다. 당황하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자연 한가운데를 마주하니 몸에 힘이 자꾸 들어갔다. 그 와중에 물속에서 보이는 형형 색색의 물고기들은 신비로웠다. 영 뻣뻣하기만 한 것 같은 내 몸짓과는 다르게 하늘하늘 물에 몸을 맡기고 편안하게 파도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산호를 뜯어먹기도 했다. 사람들과 함께 물속 공간을 공유하는 게 꽤나 익숙해 보였다.
투 스텝 포인트는 물 밖에서 보면 바위가 많아 보이지만 물속으로 들어가자마자부터 아래쪽으로 쭉 산호가 깔려있다. 산호가 얕은 물 쪽에 분포해 있을수록, 물고기가 더 많이 붙어있어서 볼 맛이 있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돌에 생긴 구멍 하나하나 마다 성게가 끼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작은 성게는 작은 구멍에, 큰 성게는 큰 구멍에 딱 맞게 자리 잡고 있었다. 크기가 커지면서 다른 구멍을 찾아가는 걸까, 아니면 구멍에 들어가 있으면 점점 몸에 맞게 구멍이 커지는 걸까?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스노클링을 하다 보니 깊은 물속에서도 파도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서 자꾸 몸이 물에 휩쓸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속에서는 방향도, 거리감도 느끼기가 어려워서 길을 잃는 게 아닌가 두리번거리게 된다. 외국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깊은 물까지 가거나 멀리까지 가서 스노클링을 하는데, 나는 자꾸만 겁이 났다. 이런 열린 장소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려면 수영 실력을 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스폿에 젖어 들어 액티비티를 할 수 있는 것이 특별한 경험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안전에 대한 준비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구나를 깨달았다. 세네 차례 물에 들어갔다가는 벌벌 떨면서 나왔다. 파도 때문에 물 안의 시야가 흐려져 더 이상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바위에 앉아 그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다를 생각했다.
바다는 모두를 환영하는 듯 초대하지만, 강력한 힘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시험한다. 아름답고 위험한 팜므파탈처럼, 양면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말이다. 상대가 버텨낼 수 있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매력을 보여주고 즐길 수 있도록 더 넓은 시야를 열어준다. 나는 그 매력에 이끌려 바다에는 몸을 담갔고, 차갑고 매서운 물에 몸이 굳어버렸다. 아직은 맞설 준비가 안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따듯하게 몸을 말려주는 햇살을 느끼며 자아 성찰과 공상에 빠져있던 그 순간, 누군가가 크게 외친다.
"dolphin!"
이곳에 돌고래가 나온다니. 갑자기 동물 레이더가 불끈불끈 움직인다. 아, 이럴 때 내 시력이 좀만 더 좋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돌 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참을 함께 먼바다를 응시한다. 한 순간, 꿈속 장면처럼 머-얼리 돌고래 3마리가 매끈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물 위로 점프하는 게 보인다. 너무 짧은 목격담.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들은 바다를 무서워하는 것 같진 않다. 바다에 융화되어 같은 질감과 온도와 속도를 지니게 된 것일까? 느려 터지고 뜨겁고 연약한 내 몸뚱이가 언젠가는 바다를 좀 더 닮아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