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소중한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달린다
나는 날씨에 예민한 여행자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제주 여행 글에서 흐린 날은 나쁜 날이 아니라고 쓴 적이 있지만, 솔직히 나 스스로는 여행 중 만나는 비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구름을 몰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나라서 비를 만난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겠지만, 하와이에서까지 그 패턴이 들어맞는다면 내 운명을 탓하며 우울함에 깊이 빠질 것 같아 여행 전에 유난히 더 일기예보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하와이에 오기 2주 전에 갑자기 이 땅에 폭풍에 가까운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소식을 봤다. 으아니, 365일 중 364일이 맑다는 하와이에 폭우라니…… 모르는 게 약이다 싶을 정도로 야속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찼다.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올려주는 사진에는 너무도 익숙한 그레이톤의 하늘과 사물들이 풀 죽은(?)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다행히 하루하루 지나면서 거친 날씨는 거두어졌지만 다가오는 여행 일정 중에도 구름과 비 예보는 약간 끼어 있었다. 소심한 나는 출발 전날 짐을 쌀 때까지도 수영복을 가져가야 하는지, 이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이런 걱정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듯, 빅아일랜드에 도착한 날 하늘은 무척이나 맑고 푸르렀다. 도착한 날 밤, 어설프게 장을 보고 침대에 누웠다. 낯선 잠자리 때문인지 시차 때문인지 잠이 쉽사리 오질 않았다. 습관처럼 날씨 앱을 켰다. 내일은 맑음이란다.
“아 근데 내일 뭐하지?”
그제야 여행 계획이라고는 스폿 몇 개와 맛집이라는 곳을 몇 군데 찍어놓은 게 다였던, 안일한 나의 지난 2주가 떠올랐다. 여행 계획을 짰어야 했는데, 시간은 벌써 밤 11시다.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늦은 시차로 벌은 시간만큼 몸은 더 피곤하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이런 것일까.
그 와중에도 마음이 급했다. 빅아일랜드에서 주어진 시간은 출발, 도착을 제외하고 고작 다섯 날 뿐이다. 아, 너무 생각이 없었나. 날씨가 좋을 때만 할 수 있는 걸 빨리 결정해야 되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데!
날씨가 좋아야만 할 수 있는 일. 물놀이와 야외활동이다. 그중에서도 물놀이는 아침 일찍 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잠깐 제쳐두고, 빅알에는 마우나 케아라는 산의 일출과 일몰이 그렇게 장관이라던데, 가는 길이 험해 고생스러우니 일몰과 일출 중에 한 번 정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왕복 3시간 넘게 소요되고 정상까지는 오프로드가 길게 이어져 있어 시간과 열정을 꽤 투자해야 하는 여정이었다. 게다가 일출을 보려면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 1-2월 빅아일랜드 일출시간은 대략 6시…………… 이런저런 변수까지 고려하면 3시 반-4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타임라인이었다.
당장 잠들어도 3-4시간밖에 자지 못할 것 같은데, 못 일어날 것 같은데, 하면서도 내 손은 기계적으로 알람을 맞추고 있었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ENFJ인 나는 이럴 때 본능적으로 맘먹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의 ENTJ로 둔갑을 해버리고 만다. 곧 만날 미래의 나에게 신뢰를 보내며 잠을 청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숫자를 가리키는 알람이 울렸다.
글자 그대로 눈꺼풀이 떠지지가 않는다. 잠에서 덜 깬 뇌는 벙벙하고, 외출 준비를 위한 동선은 번잡하다. 자동 모드로 옷을 껴입었다. 저작운동을 하면 잠이 깬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 같아서 전날 마트에서 산 대용량 할라피뇨 감자칩과 M&M이 박힌 초코칩 쿠키, 레몬 사탕, 물을 장바구니에 쑤셔 넣었다. 일단 출발! 말고는 내려진 명령이 없었다.
그날 새벽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아직 새 날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처럼 깜깜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시내를 조금 달리다가 이내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 2차선 산길로 접어들었다. 간간히 반대편에서 마주 오는 차들의 불빛으로 도로의 생김새를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잔잔한 음악을 틀고 멍을 때리는 것뿐이었다. 여행을 위해 시간을 무리하게 쓰는 것도, 자연 속에서 완전한 어둠을 만끽하는 것조차도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반가웠다. 산 쪽으로 다가갈수록 온도는 낮아지고, 옷 사이로, 발가락 사이로 추위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함께 우리와 달리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별들이.
마우나 케아는 4000m가 넘는 산 중에 거의 유일하게 자동차로 정상까지 갈 수 있는 산이라고 한다. 해발고도는 4205m, 해저 부분까지 포함하면 10000m가 넘는다고 하니 정말 높고 큰 산이다. 원주민 언어로 지어진 이름인데 뜻은 흰 산, 겨울이 되면 꼭대기 봉우리 쪽에 흰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이라 붙여진 거란다. 꼭대기에는 세계 최대의 천문대가 위치해 있는데, 이곳이 오늘의 최종 목적지. 산 높이가 꽤 되다 보니까, 고산병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중간 지점인 비지터 센터에서 30분 정도 쉬면서 적응을 한 뒤에 마지막 구간인 오프 로드를 통해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 오프 로드 구간이 꽤 꼬불꼬불하기도 하고 험해서 4륜 구동 차가 아니면 진입을 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고 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비지터 센터에서 상황을 안내하는 레인저들조차도 출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
5시가 좀 넘은 시각, 비지터 센터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 우리를 따라온 별이 하늘 위에 가득히 떠있었고, 산 너머 쪽에는 아주 살짝 붉은빛의 띠가 감돌기 시작했다.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혹시 고산병 증상은 아니겠지.
비지터센터에서 30분을 꽉 채우기도 전에 해가 떠오를까 봐 서둘러 마지막 구간을 올랐다. 노면이 안 좋으면 차에서 이렇게 몸이 흔들거릴 수 있구나, 힘없이 흐들거리는 남편의 핸들 잡은 팔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남편은 온몸에 힘이 빡 들어갔을 테지만, 철없는 조수석의 아내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서히 산을 오르며 조금씩 떠오르는 해와 시시각각 바뀌는 주변의 풍광들을 마주하니 정상에 닿기도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린 기분이었다. 남편과 나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받아들이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드디어 정상.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빼곡한 구름 위쪽으로 뽈록하게 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황홀하고 광대한 그라데이션이라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낯선 광경이었다. 밟고 선 땅 한 켠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산 아래로는 빡빡하게 구름 층이 쌓여 눈 덮인 광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뛰어내리면 딱딱하게 밟힐 듯한 구름은 처음이었다. 바다 같기도 하고, 땅 같기도 한 구름 위의 산 위에 선 기분이 이상하게 먹먹했다. 차 문을 열면 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정상의 온도는 낮았지만, 계속해서 밖으로 튀어나와 이 모습을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의 감각은 얼어붙고, 눈으로 보는 풍경만 더욱더 선명해져 왔다. 살아오면서 많은 일출을 본 것 같지만, 마우아 케아의 일출은 특별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무리했던 오늘 새벽의 첫 출동은 충분히 가치로운 도전이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오래 달려, 오래 기다려 만난 태양은 너무도 순식간에 떠올라버렸다. 태양의 높이가 훌쩍 높아지고 하늘이 파래져올 때까지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생각했다. Big island, 여긴 도대체 어떤 땅일까? 그리고 이곳으로 날 불러낸 이 땅의 첫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이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토록 짧지만 아름답고 소중한 한 순간을 위해 어쩌면 나는, 우리는 지금도 달려가고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