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커피를 만난 곳은 좋은 여행지가 된다.
목욕 프로젝트가 급히 종료되고, 귀국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한 달 여 정도 유럽에 머물렀는데, 막상 돌아가려고 하니 아쉽고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이별을 외면하고 질척거리는 사람처럼, 어떻게든 남은 순간을 특별하게 채워보고 싶었다. 일정 상 너무 먼 곳은 갈 수가 없었던 지라, 뮌헨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근교 도시를 찾아보기로 했다. 기차로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뉘른베르그라는 도시가 있었다. 남편과 함께 다음 날의 가장 저렴한 기차표를 무작정 끊었다.
이상하게도, 여행자의 기차 시간은 늦어서 허겁지겁 맞추어야 왠지 자연스럽다. 너무 이른 시간을 택했는지, 몸은 고단한데 마음은 급하고, 출발부터 뮌헨 중앙역까지 계속 헥헥대며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해가 채 뜨기도 전 시간, 모든 것이 잠자는 거리에 역사 내의 가게들만 아랑곳하지 않고 활기차게 빵과 프렛츨, 샌드위치를 팔고 있는 풍경을 보면 다행스러운 기분이 든다. 깊고 막막한 유럽의 밤을 헤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안정감을 준다. 물 한 병과 우물거릴 빵조각을 사서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 여행에서 재미있는 점은, 한적하고 비교적 편안한 자리는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고 먼저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동시에, 좌석이 채워지면서 선택권이 많이 없어지면 모르는 사람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되도록이면 남편과 마주 보고 앉긴 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나 또한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허벅지가 긴 외국인들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맞대고 앉는 것이 굉장히 쑥스럽게 느껴졌는데, 이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표정의 변화도 고민도 없이 척척 앉았다가, 자신의 목적지에서 내리면 그뿐. 역시 쿨내가 난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서, 때때로 그들의 옷차림이나 생김새, 표정 등을 꽤 오래 바라보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를 생각하니 우리는 적어도 서로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뉘른베르그 역에 도착한 때는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역사는 크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인포센터에서 종이 지도를 받아 드는 것으로 새로운 도시의 탐구를 시작할 작정이었다. 유난히 하늘이 파랗고, 그만큼 공기는 더 차갑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패딩 점퍼를 입었고 3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손발이 꽁꽁 얼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상점도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 마음의 고향을 만났다, 세계 어딜 가든 내가 아는 곳 하나 정도는 있게 해주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남편은 애처럼 핫초코를 마셨고, 나는 고향 커피 말고 다른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티 종류를 마셨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가 좋아서 커피 공부도 하고 수업도 듣고, 암튼 커피깨나 마셔본 사람이다. 하루에 3잔씩 꼬박꼬박 마시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 어느 순간 커피 자체의 고유한 향이나 풍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저 물처럼 들이켜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커피를 더 오래, 온전히 누리고 싶어 하루에 마시는 양을 1잔, 혹은 2잔으로 제한하게 된 지가 꽤 되었다. 스타벅스 말고 뉘른베르그만의 커피 가게가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지키고 싶었다.
음료 두 잔 값으로 몸을 잠깐 녹인 뒤, 새로운 색감의 도시를 만끽하기 위해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도시 산책, 또 다른 말로는 헤매기. 돈 없고, 시간만 있는 여행자가 택할 수 있는 쉽고 멋진 전략. 아는 길은 헤매면 시간 낭비이지만, 처음 본 길을 헤매는 건 모험과 탐색이니 부담이 없다.
종이 지도를 펴 들었지만, 사실상 구글 맵을 사용하는 빈도가 더 높다. 종이 지도는 좀 더 먼 시야에서 도시의 큼직큼직한 포인트들을 보는 데 좋다면, 구글 맵은 내가 어딨는지를 짚어 주고,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세세하게 알려주니까 이제는 손에서 떼놓을 수 없다. 카페나 식당에 대한 평가가 구글 맵 리뷰에서 꽤 솔직하게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제한된 장소를 방문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올린 이미지와 함께 리뷰의 별점 평과 의견을 꼼꼼히 살펴보곤 한다.
나는 사실 지도를 잘 읽지 못하는 편이고, 길눈도 그리 밝지 않은 편인데, 남편은 가보지 않은 길도 제법 감으로 잘 찾아내는 편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던 시절에는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해결을 해야 했지만, 남편과 함께하면서는 분담의 미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휴대전화로 어떤 카페를 가면 좋을까 살피면서 이동하는데, 느낌이 확 오는 곳이 있었다.
“오, 여기 가보자!”
도시를 따라 흐르는 강 둑 너머로 건너갔다. 다리는 그림에서와 같은 독특한 모양이었는데, 경험해보지는 못한 먼 과거의 이곳을 상상해 보게 하는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새로운 풍경에 눈이 즐거워지고, 추위가 조금씩 잊힐 무렵 카페에 도착했다. 가게의 전반적인 색감이 외부의 바닥 색과 비슷한 브라운 고동색 톤이어서 안에서든 밖에서든 배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부는 넓지 않았으나, 아늑한 느낌이었고, 주문 카운터 옆 유리 쇼케이스에는 이제껏 독일에서 경험하지 못한 분명히 맛있을 것이 틀림없는 타르트, 케이크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독일은 빵은 참 맛있는데 디저트류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기억이 많아서 기대감이 한껏 올라갔다.
나는 계절 무관 얼죽아 타입이지만, 커피가 진짜 맛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우유가 들어간 메뉴를 시킨다. 커피에 들어가는 우유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커피를 만들어 파는 사람의 화두이자 맛의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선택은 카푸치노. 라테보다 우유 양도 적어 가성비는 안 좋을 수 있지만, 카푸치노만이 주는 입감이 좋다. 함께 주문한 살구 타르트도 부드럽고 오동통하니 눈에도 입에도 행복을 안겨주리라 생각했다. 한참 우유 스티밍에 관심이 있었던 때라, 다른 사람이 주문한 음료에 아트가 들어간 것을 보고 내 카푸치노 차례 때 동영상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젊은 여자 바리스타는 흔쾌히 그러라고 하면서, 일부러 내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카운터 가까이까지 와서 라테 아트를 만들어주었다. 여러 겹으로 쪼개진 정교한 하트가 순식간에 생겨났다.
“우와! 당케 쉔!!”
통창으로 바깥이 내다보이는 창가 좌석에 앉아 커피 한잔과 타르트가 주는 위안에 대해 감사했다. 당시에 내 마음은 프로젝트 진행 중에 하게 된 퇴사 소식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잠을 잘 못 이룰 정도로 힘들었다. 지금 이렇게 글로 써내고 있긴 해도, 사실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다.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마음이 무거웠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을 어떻게 돌파해야 될지 일주일이 넘게 부여잡고 있었던 때였다. 답은 없었고, 선택만이 가능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다 보면, 그냥 생각 스위치를 끄고 다른 사람인 척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카페에서의 시간은 내가 되었다가, 나이기를 포기했다가, 그냥 심플하게 커피와 타르트와 흘러가는 시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한 평안함이었다.
갑자기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우르르 카페로 들어왔다. 사장님이 아는 아이들인지, 학교 선생님처럼 보이는 어떤 남자를 따라 잠깐 들른 것 같았다. 애들이 내는 소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신기하게도 그 아이들은 굉장히 조용했다. 카페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어른들의 공간이라는 것을 배려해주는 것인지,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선생님 같은 그 남자와도 나긋나긋 굉장히 좋은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카페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편견이었나, 하고 속으로 괜스레 사과를 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나가고 또다시 조용히 나무로 만든 가구의 감촉을 느끼고 커피콩 자루들 같은 것들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도 모르게 한참을 앉아있다가 카페를 나왔다. 다시 나온 길거리는 더 이상 춥지 않았다.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았는데 위로가 되는 공간이 있고, 애써 찾아갔는데 나를 실망시키는 공간들이 있다. 그 이후로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도시 구경을 했지만, 나에게 뉘른베르그는 이 카페로 기억되는 걸 보면 그 공간은 아마도, 분명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