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의 시간과 천만 원, 그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
탐방은 끝났다
11월이 시작되던 무렵, 헬싱키에서 받은 연락 한 통으로 인해, 목욕 탐방 프로젝트를 예상보다 일찍 마무리하게 되었다. 당초 무서운 야망에 이끌려 계획했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아이슬란드, 체코 까를로비바리 등은 가 보지도 못한 채, 최대한 빨리 귀국을 해야만 했다. 반갑고 기쁘면서도 서운하고 왠지 이 모든 상황이 내키지 않는 듯, 양가감정이 들었다. 좋은 소식은 새로운 회사로 취직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 소식이 의미하는 바는 더 이상 목욕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사용한 모든 비용을 뱉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붕 뜬 시간은 무엇일까? 지난 몇 달간 기를 쓰고 진행해 온 것들은 이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 인식 체계의 독특한 점은 특정 영역에 초점이 맞춰지면 그 부분에 대한 가중치가 급상승하고,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가치 절하되거나 간과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너무도 간절히 바랐고, 이루고 싶었던 어떤 목표이었기에 내게 이 프로젝트는 다른 것보다 우선되었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중요한 가치로 다가왔었다. 물론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회사가 합법적으로 개인인 나에게 시간과 돈을 내어 주었기에 실제로도 가치 있었지만, 나는 내 선택이 바꿔버릴 수 있는 가까운 미래조차 알지 못한 채로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 했고, 정말 잘 해내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가치와 가중치가 바뀌어버린다면 원래의 최선과 잘 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오롯이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내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어떤 것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인정해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첫 탐방이 시작되던 즈음, 한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었다. 프로젝트 시작과 함께 채용 과정이 진행이 되었고, 어떻게 어떻게 자꾸 다음 스텝으로 진행이 되어, 두 가지 트랙을 모두 겁나게 내달려야 하는 일종의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맘이 편치 않았다.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각기 다른 두 가지 마음으로 큰 일들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게 긴장되었고, 마음이 쿵쾅거리기도 했다. ‘이래도 될까.’ 초반에는 고민도 매일매일 했던 것 같다. 스스로가 세운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는 타입이다 보니 어느 쪽도, 약속을 깨버리는 일을 나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싶지가 않았고, 그저 둘 다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모든 채용 과정은 끝이 났고, 선택의 순간이 남아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기존의 직무와 회사에 대한 회의감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오고 있었던 터라, 어쩌면 선택은 처음부터 명확했고 단지 그 선택지를 위한 수습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선택지는 나를 불행에서 건져줄 수 있을까? 큰 질문에 대한 답은 늘 시차가 있다.
빌려 쓴 줄 알았던, 그러나 내 것이었던 모든 순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 같이 뻔하고, 동시에 다 달라서 재미있다. 눈이 간다. 궁금하다. 심리학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인간 존재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몇 년을 공부하고 수없이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나는 아직도 사람을 잘 모르겠다. 목욕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주제로 연구 같은 여행을 하다 보니 피부나 머리카락 색, 눈동자 색, 언어, 체구, 성별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감각이 있고,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활용해 스스로를 심신을 회복하고 보듬으려 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지만, 열심히 찾아낸 방법이 전통이나 레시피가 되고, 사람들이 즐겨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새삼 신비로웠다. 별 것 아니었던 목욕 행위를 통해 인류 역사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남의 돈인 줄 알았던 그 돈, 허락받고 빌려 쓴 줄 알았던 그 시간, 따지고 보면 사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 프로젝트 서약서에 쓴 대로, 회사를 떠나게 되면 모든 비용을 반납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결국 나의 목욕 탐방 프로젝트는 온전한 시간을 보내고 마땅히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을 쓴 여행이 되었다. 사실 그래서 더 좋았다. 합법적으로, 또 배신 아닌 것 같은 배신으로 귀국 직후 퇴사를 하게는 되었지만, 내가 만들어간 그 시간만큼은 나 다움으로 살아 있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지루한 일상과, 열정은 여유 혹은 사치인 환경에 매몰되어 죽어가던 나를 그 시간이 빛나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못하는 건 돈이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과 돈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사용할 용기가 부족해서인 것 같다. 그 이후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판단하거나 예상하지 않았기에 각각의 도전이 더 기쁘고 즐거웠던 것 같다. 모든 기회는 각각 그때뿐이다. 나 또한 특별히 더 담대한 성격도 아니고 인식의 한계가 명확한 보통의 사람이기에 가보지 않은 길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한번 선택한 길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고, 깨어 있으려 했고, 정성 다해 채워나갔다. 후회는 조금도 없다. 신이 우리에게 결말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건 어쩌면 깊은 배려인지 모른다. 함부로 예측하거나 결론 내리지 말라고, 예상을 넘어선 좋은 일이 보물 찾기처럼 곳곳에 숨어있으니 그 기쁨을 그저 현재형으로 느끼라는 뜻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