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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Feb 12. 2023

떡국보다 시골 어머니표 백반

그 남자의 요리생활

시골은 풍경만 보면 여유와 평화가 깃들어 있는 것 같지만 사람은 늘 분주하다. 가을과 봄 사이 겨울에도 일이 많다. 초겨울엔 가을의 수확 뒤에 갈무리할 것이 많고 늦겨울엔 다가오는 봄을 준비해야 한다. 농사를 크게 하는 사람이든 작은 규모로 짓는 사람이든 저마다의 일로 추운 날에 몸을 써야 한다. 어머니가 가꾸는 자두밭은 혼자 하기에는 조금 부담될 정도의 크기라 때때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한다. 남이든 가족이든. 설날 무렵에 해야 하는 큰 일이 있는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가지를 치는 일이다. 나무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지만 인간이 재배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전문가의 손을 거쳐서 잘린 가지는 온 과수원 바닥에 흩어져 있는데 이걸 모으고 만지기 좋은 단위로 묶고 집으로 가져오는 일은 대체로 동생과 내가 한다. 집 한 켠에 키보다 높게 쌓아 둔 나무는 몇 개월이 지나면 잘 말라서 어머니 황토방에 땔감으로 쓴다. 그러니 민족의 대명절에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그득하지만 자두나무 가지 들이는 일을 해줄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린 어머니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나는 적성상 아내와 제수씨와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체질에 맞는데, 힘을 써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어머니가 미리 다 묶어 놓은 자두나무 가지를 경운기에 싣고 오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어머니는 한 시간이면 된다고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적어도 서너 시간을 걸릴 일이란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다. 동생과 나는 손발이 잘 맞는 편이다. 일머리가 좋은 동생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된다. 두 형제가 힘을 모으니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마당에 수북이 쌓인 자두나무 가지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흐뭇해지는데 배는 고파왔다. 밥값은 충분히 했으니 당당한 마음으로 엄마표 밥상을 차례다.


있는 반찬 되는 대로 먹자며 어머니는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옆에 뭉근하게 끓인 어머니표 특제 경상도식 소고기뭇국이 올라왔다. 농장에서 재배한 채소로 만든 김치만 해도 네 종류다. 지난 겨울 담근 김장김치는 이제 제대로 삭아 새콤하고 시원한 맛이 절정이었다. 손수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가 기분 좋은 매운맛을 냈다. 무말랭이는 내가 없어서 못 먹는 반찬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걸 오그랑지라고 부르는데 무가 꾸덕하게 말랐든 오그라들었든 두 이름 다 정겹지만 오그랑지가 나한테는 표준어다. 이 오그랑지에는 마른오징어가 들어가는데 김치양념에 불은 오징어가 별미다. 귀한 삭힌 깻잎으로 만든 김치는 다른 데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쉽지 않다. 양념이 잘 밴 부드러운 깻잎으로 만 밥은 꿀맛 중의 꿀맛이다. 가슴을 뻥 뚫리게 해 줄 시원한 동치미는 어머니가 가장 잘 만드는 음식이다. 주변에서 좀 팔면 안 되냐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동치미는 군내가 나기 전까지 맛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머니는 풋고추찜도 잘하시는데 늘 하던 풋고추찜이 아니라 찐 고추에 김치 양념으로 반찬을 했다. 밥을 비벼 먹고 싶었다. 


돼지갈비찜도 특별한 일이 있거나 손주들이 왔을 때 자주 하신다. 소갈비는 비싸서 안 쓰시는 것 같다. 그래도 짭조름한 어머니표 돼지갈비찜은 별미다. 익히지 않고 냉동한 팩을 한 움큼 주시면 받아와서 자주 먹는다. 나도 요리라면 좀 하지만 애들은 할머니가 만든 걸 더 좋아한다. 일꾼 밥상에 생선 한 마리 빠질 수 없으니 수산유통업을 하는 뒷집 형님이 때때로 가져다주는 고등어도 구워서 올린다. 바다 출신 음식을 하나만 올리긴 섭섭하니 밑반찬으로 한 통 그득 만들어 둔 멸치볶음을 곁들인다. 큰 아들이 멸치볶음 좋아한다고 언제나 냉장고에 들어 있는 밑반찬이다. 김장하고 남은 새우젓을 양념으로 살짝 무친 반찬은 오랜만이다. 


명절 앞두고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냐고 하니 어머니는 있는 것 되는 대로 차렸다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하지만 동생과 나는 안다. 오랜만에 내려와서 땀 흘리며 일한 두 아들에게는 상다리가 진짜로 부러질 때까지 차려도 늘 부족한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이 근사한 밥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지만 애틋함과 든든한 마음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떡국보다 시골 어머니표 백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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