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궁 Jan 08. 2023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배춧국 한 그릇

그 남자의 요리생활

고기 삶은 물을 버리자니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수육을 만들기 위해 압력솥에 물과 고기, 된장, 파를 넣었다. 강한 압력으로 40분 정도 삶으면 고기를 고기답게 서로를 붙들고 있던 섬유들이 느슨해지면서 부드러움이 더해진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그건 요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드러움을 타의로 택한 고기는 그 댓가로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국물에게 내어준다. 맹물은 살코기의 맛과 향, 젤라틴의 진득함, 비계의 기름짐으로 풍성해진 그야말로 고기 국물이 된다. 부드러운 수육이 목적이었으니 이 국물은 수육의 촉촉함을 더하기 위해 끼얹는 용도로 쓰고 버려도 그만이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라면 이걸 놓치면 안 된다. 전문가, 아마츄어를 막론하고 음식을 하는 사람에겐 음식 버리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이 없다.


겨울배추가 아직 단맛을 잃지 않았다. 무도 여전하다. 따뜻한 국 한 그릇이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질 것이다. 돼지고기 삶은 국물을 냄비로 옮겨 놓는다. 배춧잎 대여섯 장, 무 조금, 마늘 서너쪽, 대파 반 대, 된장 한 술을 준비한다. 국물을 끓이기 시작하고 제일 먼저 무를 썬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잘린 무의 단면에서는 곧장 물이 배어나온다. 흐릿한 무향이 살짝 올라오니 좋은 무인지를 알겠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곧장 냄비에 넣는다. 먹기 좋은 크기라는 말만큼 모호한 표현도 없지만, 내 기준으로는 잘라 놓은 조각 몇 개가 숟가락에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고 입에 넣어도 입술을 툭툭 치면서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뜻한다. 배추보다는 무가 익히는 데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먼저 넣는 것이고 뭇국이 아니라 배춧국이므로 무는 그저 조연의 역할을 할 정도만 하면서 국물의 시원함을 받쳐주는 정도의 양이면 충분하다. 불투명했던 무는 끓는 국물 안에서 이리저리 춤추다가 반투명한 상태가 된다.


배추 역시 먹는데 불편함이 없는 크기로 툭툭 자른다. 배추가 단단할수록 칼질은 더 경쾌하다. 맛있는 즙도 많다는 뜻이다. 참을 수 없어 한 조각 집어서 우적우적 씹어본다. 들큰하고 달다. 쌈장을 굳이 찍지 않아도 된다. 아내도 나도 나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예전에는 입에도 안 대던 생배추가 맛있어 졌다는 걸 근거로 댄다. 둘 사이에 당연히 아무런 논리적 상관관계가 없을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배추는 맛있다. 배추맛을 알게 되었으니 내가 늙었나보다 하면서 슬퍼할 것이 아니라 배추가 맛있어서 행복해진 찰나에 집중할 일이다. 나이 든다고 나쁜 일만 있겠나. 배추가 주인공이니 듬뿍 넣는다. 냄비 속을 가득채워도 금세 숨이 죽어서 국물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마늘은 음식의 균형을 잡아주는 데 탁월한 재료다. 마늘이 없으면 안 넣으면 그만이지만 어떤 재료들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음식의 전체적인 맛을 바꾸기도 한다. 마늘 몇 톨은 칼등이나 칼 손잡이로 으깨서 넣는다. 대파도 어슷썰기를 해서 넣고 단맛이 조금 더해지기를 기대한다. 채소들이 어느 정도 익어서 국물에 제몸이 가진 것들을 제법 내놓았을 때쯤 간을 본다. 간이 부족하면 된장을 조금 풀어서 더한다. 그래도 뭔가 허전하고 부족하고 느껴진다면 미원이나 다시다를 한 자밤 정도 넣어도 된다. 죄책감은 갖지 말자. 내가 재료에서 뽑아낸 감칠맛이나 봉지에서 꺼낸 결정에서 나온 감칠맛이 화학적으로는 다름이 없다. 집밥이니까 이건 무조건 천연재료와 정성으로 빚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집밥이든 식당밥이든 음식은 맛있어야 하니까. 간장도 식초도 고추장도 된장도 다 직접 만들어 쓸 것 아니라면 감칠맛 조미료에만 굳이 그렇게 인색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


국물의 기포가 터지면서 내는 보글보글 하는 끓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다. 설레게 한다. 냄비 뚜껑을 들썩이게 하는 뜨거운 김에 벌써 맛있음이 묻어 있다. 이런 국은 밥을 곧장 말아야 제격이다. 큰 사발에 밥을 깔고 배춧국을 한가득 담는다. 슥슥 비벼서 한 술 뜬다. 진득하고 달큰하고 구수하면서도 감칠맛이 터지는 국물이 먼저 들어온다. 물러진 무와 말랑해진 배추, 탱탱한 밥알을 함께 씹어서 넘긴다. 잘 익은 깍뚜기와 먹으면 다른 반찬 필요없는 든든하고 따뜻한 한 끼가 된다. 마침 바깥 날씨가 차다. 속은 더 든든하고 마음은 따뜻해졌다. 겨울 잘 날 수 있겠다.

이전 02화 제철 꼬막을 삶자 요리가 되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