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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Dec 04. 2023

장인어른의 감말랭이

그 남자의 요리생활

딱 이때다. 그것도 얼마 길지 않다. 감말랭이가 제일 맛있을 시기가. 납작하고 편편한 씨 없는 홍시가 떨어져 갈 즈음 감말랭이가 집으로 배달되어 온다. 전업 반 취미 반으로 감농사를 짓는 처가에서는 해마다 감을 보내주신다. 늦가을엔 후숙 후 개봉을 해야 할 날짜가 장인어른의 멋진 글씨체로 적힌 박스 하나가 온다. 서두르지 말고 때를 기다려 며칠을 두었다가 박스를 열면 딱딱하고 떫었을 감은 속이 다 비칠 듯 투명하고 말랑말랑한 홍시가 된다. 익지 않은 것과 완전히 익은 것이 어떻게 같은 감일까 싶을 정도로 변화는 극적이다. 후숙의 마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아내의 아빠, 엄마가 보내신 것이니 아내가 잘 먹으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 집에서 감을 제일 잘 먹는 사람은 그분들의 사위인 나다. 전성기(!) 때는 앉은자리에서 홍시 10개를 먹고도 끄떡없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못 먹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서 내가 이 분야에서는 서열 1위다. 해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땡감이 제 주인을 못 찾고 떨어지기 시작하면 은근히 처가에서 감박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두 분은 여전히 건강하시지만 그 기다림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맛있는 홍시 사이에서 더 맛있는 홍시를 가려 찾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먹을 때만큼은 과즙 한 방울 남김없이 먹으려고 한다. 부모님의 농사짓는 걸 곁에서 지켜본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홍시 뒤에 오는 감말랭이는 조금 더 특별하다. 일단 맛이 기가 막히다. 홍시도 달지만 응축된 단맛으로는 감말랭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리고 통으로 말린 곶감과 달리 잘 만든 감말랭이의 질감은 어디다 비길 데 없이 독특하고 독보적이다. 쐐기 모양으로 잘라 말린 감은 각 부분의 성질이 다르다. 쐐기의 날카로운 끝부분은 가장 많이 말라서 쫀쫀함이 일품이다. 속살 부분이라 마냥 딱딱하지만도 않다. 껍질이 싸고 있던 가장 넓은 바깥 부분은 약간 쭈글쭈글한 느낌을 주면서도 탱탱함을 잃지 않는다. 겉은 이렇게 쫄깃하지만 속살을 물기를 다 잃지 않고 부드러워서 혀에 감긴다. 한 조각 안에 이렇게 다양한 질감과 촉감을 갖춘 과일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맛이 고급지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입이 심심할 때 가볍게 한 조각 두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리지만 때때로 살살 녹여가며 먹기도 한다. 감말랭이를 만든 분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길게 느껴보기 위해서…


감말랭이의 고급진 맛 뒤에는 섬세한 사람의 손길이 있다. 홍시야,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깨끗한 감을 따서 박스에 포장해 보내기만 하면 되지만 감말랭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홍시는 자연이 적극적으로, 사람이 소극적으로 개입하지만, 감말랭이는 사람의 손을 제대로 타야 비로소 감말랭이다운 감말랭이가 된다. 그냥 말리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만드는 이의 경험과 노하우가 없이는 안 된다. 가장 간단한 음식을 맛 내는 일이 제일 어려운 것처럼. 


감이 나무에 달린 채로 붉은색을 띠기 시작하고 완전히 다 익기 전 어느 시점에 가장 적당한 때를 골라 감을 딴다. 가장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는 글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하고 따는 사람의 감각에 기댄다. 그리고는 꼭지를 도려내고 껍질을 돌려 깎는다. 수백 개를 깎다 보면 늙고 굵은 손마디가 점점 저려오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멈출 수가 없어서 앉은자리에서 다리로 몇 번 뻗어가면서 결국은 다 깎는다. 깎았다고 끝이 아니어서 감의 크기에 따라 6등분, 8등분을 한다.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서 자연풍으로 말리면 좀 더 낭만적이겠지만 낭만보다는 균일한 품질 관리를 위해 농업용 건조기를 쓴다. 서로 붙지 않게 건조대 위에 올리고 49도로 세팅한 건조기에서 15시간을 말린다. 스무 시간 정도는 그대로 두었다가 쪼그라들어서 간격이 넓어진 감조각 들을 다시 모아다가 같은 온도에서 3시간 정도 더 말려야 비로소 감말랭이가 탄생한다. 하지만 그 과정도 공산품 찍어내듯 할 수 없어서 수시로 살피고 살펴서 온도와 시간을 최상의 상태로 맞춘다. 


봄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여름에 덩치를 키우고 가을에 성숙한 감이 사람의 손과 건조기의 열풍을 거쳐 감말랭이로 탄생했다. 그 귀하디 귀한 감말랭이가 박스에 담겨서 택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먼 우리 집까지 왔다. 장인어른의 수고로움은 사랑하는 당신의 딸을 더 위해서였겠지만, 수년 전 아버지를 잃고 마음 둘 데 없는 사위는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도 아버지가 그리워서 장인어른의 감말랭이가 각별하다. 장인도 아버지고 사위도 아들이니까 누구보다 마음 따뜻한 우리 장인어른은 감을 깎고 말리면서 사위도 한 번씩 생각해 주셨을 거라고 믿는다. 홍시며 감말랭이며 처가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일이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끝날 것을 알기에 장인장모도 늙고 나도 나이 들어가는 이 시린 계절의 끝에 만나는 감말랭이의 이 찬란한 붉은 색이 나는 반갑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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