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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궁 Jan 01. 2024

우리가 오랜만에 식구가 되는 순간

그 남자의 요리생활

식구(食口) :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식구의 사전적 의미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 한 집에 살아야 하고 끼니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 한 집에 살더라도 끼니를 같이 하지 않거나, 끼니를 같이 하더라도 한 집에 살지 않으면 식구라고 부르기 어렵다. 끼니를 같이 하더라도(점심을 함께 먹는 그 수많은 직장동료들을 보라) 한 집에 살지 않는 일은 부지기수지만 한 집에 살면서 밥을 같이 안 먹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것은 한 집에서 끼니를 챙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같이 먹을 수 있도록 한 번에 차려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집에는 네 명이 산다. 나와 아내 그리고 두 딸. 한때는 열렬한 식구였던 우리 넷은 어느새 한 집에 살되 끼니를 같이 먹는 일이 드문 느슨한 식구가 되어 있었다. 아침을 안 먹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넷이 한 번에 모일 수 있을 때는 저녁뿐인데, 우선 내가 퇴근해서 집에 있는 시간과 아이들의 각자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맞지 않는다. 소식을 하는 아내도 되는 대로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밥을 먹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식구들의 끼니를 챙기는 아내는 일 인분 만큼의 밥을 하루에 대여섯 번씩 차린다. 한 집에 살아도 밥상에 머리를 맞대고 왁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드물다. 교육열 높은 이 동네 사는 대부분의 집들은 식구가 아니라 서로가 하숙생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딸들이 아빠와 함께 나눌 관심사가 없다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예전 사진 속에 등장하는 그 어여쁘고 귀여운 아가들이 조잘대던 그 순간이 가끔 그리운 아빠는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연말을 앞둔 토요일 오후, 마침 다들 집에 있었고 잘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늦잠을 자고 난 아이들이 꿈틀대며 깨어났다. 아내와 나는 오전에 미리 장을 봐두었다. 얇게 썬 소고기, 숙주나물, 청경채, 배추,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 새우, 바지락, 가리비, 고구마, 다시마, 소면, 가래떡. 샤부샤부 재료다. 식성이 제각각인 우리 가족들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가 샤부샤부다. 육수를 먼저 낸다. 샤부샤부 육수라고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다. 멸치, 다시마, 대파, 무, 버섯을 넣고 넉넉하게 끓인 다음 간장으로 간을 하면 된다. 채소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손질해서 소담스럽게 그릇에 담고, 소고기, 새우 말고도 냉동만두 몇 알을 곁들였다. 이 정도면 샤부샤부 전문점의 상차림 못지않다. 식탁 위에 오랜만에 수저 네 벌이 올라왔다. 핫플레이트를 식탁 위에 놓고 전골냄비가 따로 없어 궁중팬에 육수를 부었다. 옅은 갈색의 육수에서 몽글몽글 공기방울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곧장 끓는다. 딱딱한 순서대로 채소를 풍덩풍덩 밀어 넣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숙주는 숨만 살짝 죽여서 얼른 건져 먹는다. 종잇장처럼 얇은 소고기는 뜨거운 육수가 닿자마자 짙은 회색으로 변한다. 아이들 먹이는 일이 더 즐거운 듯한 아내는 집게로 고기를 집어서 연신 아이들 앞에다 댄다. 


좋은 말을 할 때보다 싫은 잔소리를 할 때가 더 많은 부모, 자식 간에 오랜만에 평화가 잠시 찾아왔다. 피차의 관심사나 근황을 나누거나 샤부샤부가 이렇다 저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는 궁중팬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채소며 고기를 냉큼 낚아채느라 분주했다. 오물거리는 아이들의 입 속에서 샤부샤부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고 어미새처럼 먹을 것을 나르는 아내는 흐뭇한 표정을 애써 숨기지 않았다. 칼국수 대신 끓인 소면이 아이들 입으로 빠른 속도로 빨려 들여가는 걸 지켜보며 밥이 지닌 힘에 놀랐다. 한 자리에 둘러앉은 것만으로도 나는 좋았고 ‘마, 이게 식구 아이가?’ 하는 말이 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아내와 나는 늙고 아이들은 더 커서 우리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이 뿔뿔이 흩어지겠지. 생일이며 명절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 겨우 일 년에 몇 번 한 자리에 모일 테고 그때 잠시 밥을 같이 먹는 식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에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먹는 이 늦은 점심은 찰나와도 같지만 기억 속에 꼭꼭 붙들어 놓을 테다. 또 언제 다시 진짜 식구가 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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