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팔자

투투 이야기

by Eli

바람이 불어 창밖 단풍나무 새 잎은 추워 보이는데 햇빛이 거실로 쏟아진다. 투투, 햇살이 비쳐 따뜻해진 바닥에 자리를 잡더니 배를 내놓고 네 발을 활짝 편채 낮잠을 잔다.


개는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다. 잠을 자는 것 같아도 귀는 늘 쫑긋거리며 주변을 경계한다. 몸은 반쯤 구부려 발과 꼬리는 배 쪽으로 오므려 감춘 채 잔다. 투투는 자주 배를 드러내 놓고 자는데 개들의 이런 모습은 자신의 환경에 대한 신뢰 때문이란다. 하긴 이 집에서 누가 널 공격하겠니? 이 집 아들놈이 더러 귀찮게 하긴 해도 그건 애정이잖아. 그치? 투투? 그래도 투투, 그.. 자센 좀... 아닌 거 같구나. 혹시 거.. 풍 하는 거니? ^^;;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을 떴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듯 빙그르 몸을 돌려 다시 네 활개를 치고 잔다.




이놈, 팔자 좋은 놈 아닌가. 오줌, 똥 치워주고 목욕시켜 주고 녀석의 신호에 따라 간식 주고 문 열어주고 정해진 시간에 밥 주고 산책시켜 주고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깬다. 장난감을 물고 오면 바쁘다가도 던져주고 놀아주니 좋은 팔자 아닌가. 그러다 졸리면 소파나 바닥, 카펫 위에 벌렁 누워 잔다.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다.


팔자가 좋다는 것은 뭔가. 각종 의무나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그렇다고 자유로울까만) 돈이 많아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 (돈이 많다고 사는 일이 쉬울까?) 정해진 의무나 역할에서 벗어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니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오류가 아닌가) 배우자를 잘 만나 편안한 것? (배우자를 잘 만나도 개인의 문제는 늘 따로 발생한다. 배우자 없는 사람은 편안할 수 없냐는 비판도 생길 수 있다.)


머리 아프니 너무 멀리 나가지 말자. 그냥 개들이 인간에 비해 편안한 생활을 한다는 단순하고 좁은 전제에서 생각하기로 한다. 복잡한 세상에서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실존에서 보면 개들 팔자가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개들도 그렇게 여길지 모르겠다. 만일 개들의 입장 같은 게 있다면 부분적이고 편협한 관점이라고 반박하지 않을까. 개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도 결국 인간의 관점일 테지만 단순하게 내 마음대로 투투를 상상해 보면 개팔자인지 아닌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파양 되어 돌아왔을 때 투투는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짖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구할 일이 있을 때 내는- 낑낑거리는- 소리도 아닌 흐느낌이었다. 마치

"왜 나를 보냈어요. 어? 왜 그랬어? 내가 싫었나요? 흑흑"

하는 것 같은 소리였다. 짠하고 미안했다. 그랬음에도 우리는 털 때문에 괴로워 다시 입양을 보내려 했다.


투투는 밥을 먹기 위해 인간이 정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정해진 곳에 배변을 하지 않으면 질책이 따르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훈계를 듣는다. 수캐라 다리 들고 오줌 누는 건데, 그래서 조금 빗나갈 수도 있지. 아~놔. 잘못했다며 야단치는데 겨드랑이가 가려워 긁었더니 반성하는 자세가 없다며 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한다. 그래서 하품을 했더니 이번에는 버릇이 없다며 잔소리를 한다. 개니까 개 냄새가 나는 거고 털 달린 짐승이니까 털이 빠지는 거지. 지들은 냄새 안 나냐. 지들은 털 안 빠지냐. 왜 우리만 갖구 그래~~ 인간들은 모른다. 인간들의 큰 몸과 목소리와 청소기와 같은 기계들이 투투를 무섭게 한다는 것을. 투투도 눈치는 있다구. 낮고 무서운 목소리로 "투투" 하면 꼬리가 다리 사이로 말려 들어간다. 뭐야, 오늘은 주인님이야? 엄마야? 헷갈린다구~


또 어딜 그렇게 자주 집에서 나가는 걸까. 혼자 있는 건 심심해서 싫은데, 그래서 신문지나 종이 박스를 물어뜯는 건데 늦게 들어와 놓고 오히려 화를 낸다. 털이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 무서운 청소기를 너무 자주 돌린다. 청소기와 바닥을 쓸고 다니는 긴 막대기는 무섭다. 반갑다고 좋아했는데 털이 묻는다며 손으로 밀친다. 니들도 털 있잖아. 개를 왜 집안에서 기르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나도 살 권리가 있다구. 나도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라구. 그것뿐인가. 산책 가는 줄 알고 좋아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무서운 곳에 데리고 가 ㅠㅠ 동의도 구하지 않고 ㅠㅠ 중성화 수술이라며 거세를 했다! 엄마, 주인님, 거긴 정말 싫어요! 들어가면 안 되는 곳도 많고 먹으면 안 되는 것도 많다. 인간들은 볶아 먹고 끓여 먹고 구워 먹으면서 코라도 킁킁거리면 "안돼, 안돼" 한다. "투투, 안돼요. 투투 맴매. 투투 거긴 안돼." 기다리라는 건 어찌나 많은지,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지들은 인내심도 없으면서. 엄마, 나는 엄마가 아빠랑 식탁에 앉으면 너무 괴로워요. 아, 음식 냄새~~ 얼마나 먹고 싶다구 ~

행동반경을 제한당하고 인간의 기호에 맞춰 살아야 하는 투투. 힘들겠다. 사람이 결정하면 투투는 따라야 한다. 개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은 절대권력이 아닌가. 아, 투투도 사는 일이 녹록친 않다.


뭐 개 한 마리 놓고 절대권력 운운하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투투는 자신의 선택 없이 인간의 처분 아래 놓여있다. 그 인간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투투의 생활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개들은 너무 불행하게 산다.


저 눈을 어찌 외면할까. 귀가 선 투투


자신의 간식을 기다리며 얌전히 앉아있는 투투를 보면 연민과 사랑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나는 투투를 꼭 끌어안아주고 남편은 투투의 두 귀를 감싸며 "투투, 귀 없지(귀엽지)" 한다. 그러면 나는 투투에게 아빠가 아재라 아재 개그밖에 모르니 이해하라고 말해준다. 투투는 아빠의 "귀 없지"를 좋아하며 꼬리를 치고 손을 핥아준다. 계산 없이 우리의 애정을 받아들인다. 착하디 착한 얼굴로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다. 이런 것을 신뢰라 하지 않던가. 내가 믿지 않는 신뢰를 투투는 보여준다.


육아에서 벗어난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처럼 다시 돌아간 듯싶다. 외출을 하려면 투투를 맡겨야 하고 외출을 하더라도 일찍 돌아온다. 여행을 가도 돌보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잊지 않는다. 돌아와 물으면 투투는 내 침대에서 혼자 잤다고 한다. 그러면 또 마음이 짠해진다. 저 말간 눈을 한 투투를 어찌 함부로 다루겠는가. 투투는 사랑받고 보호받기 위해 태어났다. 사랑을 주어야 하는 우리에게 어떤 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우리를 온전히 믿고 따르는 투투에게 조건 없이 사랑해 주고 살펴주고 보호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 주어진 것이다. 돌아올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연민과 사랑은 다행히 순수하다.


글을 쓰고 있는 내 발 밑에 와서 투투는 애착 장난감을 핥으며 얌전히 앉아 있다. 투투 덕분에 내가 다시 글을 쓰는구나. 바깥은 싱그러운 초록으로 빛나고 집안은 조용하고 투투도 얌전하다. 오랜만에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오늘은 나도 투투와 함께 개팔자다. 투투나 나나 상팔자는 아니라도 나쁘지 않은 개팔자로구나.

투투야, 오늘은 아니 지금은 우리 평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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