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새벽에 카톡이 울렸다. 새벽 카톡은 불길하다. 한쪽 눈만 뜨고 전화기를 들었다. 병원에 입원하신 엄마의 소식이었다. 식사를 하기 시작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올해 91세인 엄마. 천식으로 입원하신 지 한 달이 되었다. 냉면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단다. 좋은 소식이었다. 기집애, 그렇다고 새벽에 문자를 하고 그래.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하다가 막 잠이 든 참이어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고 감사한 소식이네. 식사를 잘하시면 금방 회복하시겠지. 전화기는 집어던졌지만 마음은 가벼워졌다. 생전 처음 비행기 타고 나간 여행 중에 엄마가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날아와 여정을 접고 급히 돌아왔는데 이제 호흡기도 떼고 식사를 하신다니 마음이 놓였다. 찌뿌둥할 때는 수영이 약이지. 잠을 더 잘까 하다가 수영가방을 챙겼다.
주차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수반에서 함께 수영하는 회원들이다. 일명 고인물들. (연수반 회원들은 대부분 그 인원이 고정돼 있고 매일 수영을 한다. 수영장에선 그들을 고인물이라고 부른다.)
"하이, 패밀리들!"
팔을 쳐들고 인사하니 모두 까르르 웃었다. 거의 매일 만나 수영을 하고 밥도 자주 먹으니 가족이, 식구가 별 건가.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 식구고 가족이지. 고인물들이 물었다. 엄마는 어떠시냐고. 냉면을 드시고 싶대요, 하니 다들 기뻐했다.
"오늘 물에서 날아다니겠네."
안타깝게도 날아다니진 못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입수 후 10여 분이 지나면 몸이 풀리고 물이 편안해지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된다. 이 집중은 다리와 어깨, 팔, 몸통 등의 동작이 물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수영에서 내가 나를 관찰하는 알아차림은 중요하다. 동작의 오류를 정정하고 바른 자세를 익힘으로써 몸의 부상을 막고 성장하는 수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 신체의 한계를 일정 부분 극복할 수도 있다.
뻗는 팔의 스트로크와 발차기 하나하나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물밖 사정을 잊는다. 엄마, 아들놈들...., 무릎의 통증, 생의 두려움들.... 모두 잊는다. 레인을 반복해 돌다 보면 귓가에 찰박거리는 소리도 그 외의 소음도 들리지 않을 때가 온다. 호흡은 일정한 리듬으로 이루어지고 나는 그저 물에서 미끄러지면 내게서 파생된 그 어떤 것들이 물에 녹아 흩어진다. 갖가지 잡념과 계획들이 사라지고 물에서 떠다니는 자신만 남은 걸 보게 된다. 수영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인 마크 스피츠는 "물속에서 얻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말했다. 물의 저항을 오히려 즐기며 동시에 중력의 제약에서 놓여나는 자유로움은 몰입을 통해 억눌린 나를 물에 풀어놓고 세상에서 얻지 못한 위로를 맛보게 한다.
수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일 아침, 푸석하게 퉁퉁 부은 얼굴과 손을 확인하면서 자괴감에 빠졌겠지. 일상의 위력에 휘둘리며 끝내는 무기력 해져서 나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 채, 어쩔 수 없다고 툴툴거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괴롭혔겠지. 운동은 몸을 살리고 살아난 몸의 근력은 힘이 되어 그 몸의 내면을 살리는 일인데,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만 했으니 몸은 빠르게 낡아버리고 그 내면 또한 지쳐갔겠지. 그리고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혐오하며 자신을 부정하곤 했겠지.
날마다 하는 수영은 몸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수영 후엔 수영한 사람만 느끼는 특유의 개운함과 가벼움이 있는데 이 감정은 명랑한 기운을 불어넣어 사람을 기운차게 한다. 사람이 기운을 차리면 어떻게 될까. 살게 된다.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좋아서 살게 된다. 이것이 수영이 내게 주는 위로이며 힘이다. 그리고 이 위로와 힘은 동료들과 함께할 때 더 커진다.
날마다 수영하는 수영인들이여!
진정한 자유인들이여!
연수반 패밀리들이여!
모두 모두 파이팅!
"Your future is hidden in routine. "
♧ 한 달 전에 써놓은 글을 수정해서 발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