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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의 민들레

색연필 그림일기 2

by Eli


바람이 꽃씨를 불어 둥실 날아다녔겠지. 그러다 떨어진 곳이 하수구 안이었겠지.


민들레 홀씨는 광합성을 해야 한다. 그래 싹을 틔울 수 있다. 이번엔 도로의 하수구 안이구나. 조금 쌓인 흙먼지를 밟고 민들레 노란 얼굴이 하수구에서 도로 위로 불쑥 올라와 있다. 무척 큰 꽃이다. 이 열악한 곳에 뿌리를 내렸구나. 마냥 이쁘다는 마음보다 유난히 큰 민들레가 오히려 안타깝다. 바람도 참.... 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지. 그런데도 커다란 꽃을 피워냈구나!


박완서 선생의 "옥상의 민들레꽃"이란 단편이 있다. 예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어린 '나'는 유치원에서 만든 카네이션을 엄마에게 선물하는데 어느 날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본다. 그리고 엄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나'를 낳은 걸 후회한다면서 귀찮아 죽겠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다. 물론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어린 '나'는 충격을 받고 더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곤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다. 뛰어내려 죽으려고 하는데 노란 민들레 한 송이를 발견한다. 척박한 시멘트 바닥 위에 아주 적은 양의 먼지에 기대어 노랗게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고 '나'는 죽기를 포기고 엄마를 용서하기로 한다.


한편 '내'가 사는 아파트는 궁전 아파트이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이 모두 살고 싶어 하고 부러워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궁전 아파트에서 자꾸만 자살자가 생긴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모두가 살고 싶은 궁전 아파트에 살기 싫어서 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파트 값이 떨어질까 봐 회의를 하고 더 이상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내리지 못하도록 집집마다 쇠창살을 달자고 협의한다. 어린 '나'는 쇠창살이 틀렸다는 걸 직감한다. 죽고 싶은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은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고 말하고 싶다. 쇠창살이 아닌 민들레 꽃을 심자고 말하고 싶데 어른들이 입을 막는다.


물질 만능주의와 어른들의 블랙코미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옥상의 민들레 꽃"에서 단연 핵심 소재는 민들레꽃이다. 어린 '나'가 죽으려고 했지만 민들레 꽃을 보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처럼 민들레의 생명력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다. 별을 닮은 노란 민들레. 런 이유들 때문에 강아지똥도 민들레를 키우고 문학이나 노래에 자주 등장나 보다.


아침 산책길, 도로 가운데 설치된 하수구 안쪽에서 피어 난 민들레꽃 한 송이를 보았다. 꽃이 벌어진 지 단 몇 초도 안 된 것처럼 깨끗하고 장한 민들레였다. 하수구 안 쪽에서 고개를 세우고 있는 민들레꽃은 매우 크고 당당에서 차마 범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다. 실망하기도 하고 더 나은 조건과 처지를 동경하며 내게 결핍된 것에 대해 화를 낸다. 부모를 원망하고 때론 사회에 분노하기도 한다. 내가 금수저가 아니라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금수저라고 자신의 처지나 조건에 만족다고 확신하긴 어렵다.


하수구 구멍에서 피어난 민들레는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상관없이 커다랗게 꽃을 피었다. 숲속이 아니라 하수구라는 조건을 안타깝게 보는 것은 어디서든 제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얕은 안목일 뿐이다. 바람이 씨앗을 날려주었고 홀씨는 우연히 그곳에 떨어져 피어난 것일 테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제 감정을 입히곤 홀로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다. 단 하루가 되어도 꽃을 핀 것으로 충분한 것을.


꽃을 피웠으니 홀씨는 무수히 퍼져나가 다시 하수구로 떨어질 수도 있고 숲 속 안전한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고 헌신적인 강아지똥을 만나 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조건이나 처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나를 좁은 우물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고 다른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게도 한다.


그렇다고 하수구에 피어난 저 민들레를 봐. 자기 처지나 조건은 까짓,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진 말자. 그렇다고 내 처지나 조건에 대해 실망하거나 너무 오래 화를 내진 말자. 민들레를 앞세운 상투적인 의미를 강요한다고 치부하지도 말자.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손턴 와일더) 하수구에서도 저토록 크고 노란 꽃을 피우는 일이 민들레에게도 쉽지 않았을 것이니 민들레가 보여주는 생명의 힘과 위로가 내게 전해지는 건 분명하다...


며칠 후 하수구 자리엔 잎과 꽃대궁만 남아 있고 홀씨가 무수히 날아다녔다. 민들레는 뽑힌 자리에서도 다시 나고 벽돌 틈과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에서도 발에 밟히는 길에서도 뽕나무 그늘 밑에서도 버려진 차의 유리창 틈새에서도 노랗게 피어났다. 벽돌 틈이든 하수구 안이든 한 줌 흙과 햇빛만 있으면 장하게 꽃을 피웠다. 꽃을 본 어떤 사람은 무심히 지나갔고 어떤 이는 밟고 지나갔고 어떤 사람은 민들레잎을 꺽어 갔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낮춰 오래 들여다보았고 어떤 이는 탄성을 올렸다.

"어머나, 여기 민들레 좀 봐! 참 많이 피었네~

이쁘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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