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면서 일정해진다. 6시 15분. 전에 없던 일이다. 평생 올빼미로 살았는데 그 올빼미가 늙고 있다. 몸무게는 줄지 않고 아침잠이 줄기 시작했다.
창을 보며 날씨를 확인한다. 맑은 날이다. 우리 집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몸을 푼다. 끙~~ 투투야, 10분만 있다가 나가자. 엄마가 몸이 천근이구나. 나가기를 기다렸던 투투는 제 자리에 가 앉는다. 때로 숙제 같은 아침산책. 그래, 사랑도 현실인지라 숙제가 될 때도 있구나. 숙제라고 생각하는 걸 들킬까 봐 눈곱만 떼고 벌떡 일어난다. 녀석, 꼬리를 흔들며 얌전히 가슴줄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며 헤헤 웃는다.
새소리가 유난스럽다. 물비둘기 떼들이 까치들이랑 세 싸움을 하는지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소란을 떤다. 잠시 후 까치 두 마리가 귀찮다는 듯 날아간다. 물비둘기들이 이겼다. 집 뒤에서 멧비둘기도 운다. 물비둘기 들은 참새처럼 짹짹 치르르하고 멧비둘기들은 구구 구구 쿠쿠하고 운다. "쿠쿠" 하는 소리에 밥솥 생각이 났다. 쿠 0 제품인 밥솥이 며칠 전부터 밥이 다 되었다고 말하곤 "쿠쿠" 하는 것이 아닌가. 언제부터 "쿠쿠" 했냐고 식구들에게 물으니 처음부터 그랬단다. 신기하지 않은가. 왜 1년이 넘도록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왜 그랬을까? 갸우뚱 고갯짓을 하는 녀석. 다리를 번쩍 들고 볼일을 본다.
집으로 온 투투가 마당에서 노는 사이 텃밭을 돌아본다. 토마토는 굵은 알이 달리기 시작했고 오이는 덩굴손이 뻗어 나오며 오르고 있다. 네, 다섯 마디 아래 곁순을 제거하고 손톱만 한 오이도 따준다. 처음 심은 감자는 잎이 무성하다. 의심이 커진다. 과연 감자는 생기고 있는 걸까. 성공적인 텃밭 농사는 잘 잘라줘야 한단다. 곁순과 불필요한 잎들, 달리기 시작하는 열매들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1cm 남짓 자란 오이를 다섯 마디 아래로 모두 따주었다. 그런데 가지가 영 자라지 않는다. 왜 그러지? 뭐가 문제니? 비료도 주었는데... 가지 주변의 흙을 뒤집어주고 누런 잎을 잘라준다. 잘 자라라. 방풍나물에 하얀 꽃이 피었다. 방풍꽃 튀김을 해 먹어야겠다. 겉절이 할 상추 조금 따고 고추 몇 개 땄다. 투투에게 아침을 챙겨준 뒤 필사를 하고 수영장으로 간다. 필사의 문장 하나가 입안에서 맴돈다.
" 꿀벌 뒤를 쫓으면 꽃밭을 향해 거닐게
된다잖아."(드라마 미생 중에서)
수영장 가는 길에 동네 어르신 한 분을 태워드렸다. 시장에 가신다고 했다. 10분 남짓한 시간에 중요한 건 대충 다 아는 사이가 되었다. 나와 띠동갑. 그보다 더 되어 보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많이 아팠다고 했다. 건강이 최고라고 하며 내리신다. 건강.... 어딜 가나 건강 얘기다. 수영친구들도 여기저기 조금씩 아프단다. 한두 번 수술 이력들이 있으니.... 건강은 풀 수 없는 수학문제 같다. 늘 염려하며 누군가의 말처럼 잘 달래며 살아야 한다. 나 또한 며칠 전부터 왼쪽 무릎에 이어 오른쪽이 욱신거린다. 계단이 무섭다.
집으로 오다 보니 밤꽃이 피어 숲이 하얗다. 밤꽃향이 너무 진해 밤엔 창을 닫아야 하지만 벌들은 무척 바쁘겠다. 예전에 모르던, 혹은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던 자연이 계절의 색과 모습으로 꽉 차 있다.
삶의 결핍을 느낀다면 숲을 바라보라. 숲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그 안에선 모두가 바쁘고 치열하게 생을 살고 있지만 조용하다. 사는 게 시들하다면 새잎이 돋는 제라늄을 보라. 죽은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가지에서 새 잎과 가지를 밀어 올리고 꽃 한 송이를 마침내 피워내는 생명의 에너지를 보라. 일상은 남루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끝없이 변화하는 생물적 시공간이다. 자연과 눈 마주치고 그 리듬을 따라가며 다정한 몸짓과 언어로 주변과 어울려 사는 것이 무사히 늙는 법이 아닐까. 꽃 한 송이는 소리 없이 피었다가 꽃이 진 자리에 반드시 열매를 남긴다. 일상을 다 살아낸 내 뒤엔 어떤 열매가 달릴까. 내 뒷모습을 사람들은 볼 것이다. 눈만 뜨면 근심인 세상을 넘어서며 나는 무사히 잘 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