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남들보다 늦은 4월 중순에 감자를 심었다. 다용도 팬트리를 정리하다가 언제 사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감자가 비닐봉지 안에서 얼기설기 싹을 틔우고 있었다. 감자 심는 시기는 지나버렸고 버릴까 하다가 못 먹으면 말지, 하며 뒤늦게 감자를 심었다. 감자를 심어놓고 다음 날 엄마네 감자를 심기로 했다. 엄마도 어쩌다 늦어졌다고 했다. 감자가 안 나오면 어떡하냐고 하니 늦은 만큼 늦게 캐면 된다고 하셨다. 아하! 때 놓쳤다고 아예 심지 않으면 감자 사 먹어야 하잖니. 아주 늦어버린 것은 아니니 늦게라도 심으면 돼, 하셨다. 그렇군.... 옳은 말씀이십니다.
"얘, 나는 쉰소리 안 해. 서울대 나오면 뭐 하니? 죄다 쉰소리만 하고 있잖니." 사회, 정치 평론까지 가볍게 하시는 오마니. 내가 그래서 서울대 안 갔잖아. 쉰소리 안 하려고, 하며 쉰소리하는 딸에게 또 한 마디.
"선상님, 그건 아니구요."
"ㅋㅋㅋㅋㅋㅋ"
"너 감자는 심어 봤니?"
"왜 이러셔요. 시골살이 19년 차입니다. 어제 집에서 심었답니다. 저를 뭘로 보십니까."
잘난 척을 하며 열심히 감자를 심는 딸에게 엄마의 한 마디.
"얘, ㅎㅎㅎㅎ 감자를 거꾸로 심었잖니? 싹이 위로 올라오게 심어야지."
"뭐? 싹이 위로 와야 한다고? 어이쿠!"
"왜 그러니? 니 집 감자 잘못 심었구나. ㅋㅋㅋㅋㅋ 선상님."
쉰소리에 쉰 행동까지 하는 딸을 놀리신다.
집에 와 컴컴해지는 밭에서 심은 감자를 도로 캐서 다시 심었다. 열흘쯤 지나니 싹이 나오고 하얀 감자꽃이 예쁘게 피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감자꽃을 잘라주고 열심히 물을 주었다. 감자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면 캘 때라고 했다. 감자잎이 시들하니 돌돌 말리는 걸 보고 물을 주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 감자를 캐니 골프공만 했다. 다시 물을 주고 보름쯤 지나 감자를 캐 보니 씨알이 제법 굵었다. 마트에서 파는 그 감자였다. 처음이라 그랬을까. 감자가 너무 대견해서 마음이 감자처럼 몽글거렸다.
하지 감자를 캐고 나면 장마가 온다. 장마가 지나면 가을 감자를 심는 시기다. 7월 말에서 8월 중순쯤 감자를 심으면 가을 감자를 먹을 수 있다. 요즘은 기후가 변해서 오히려 가을 감자가 잘 된다고 하니 감자를 봄에만 심는 것은 아니었다.
캔 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감자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때를 놓쳤다고 싹이 난 감자를 버렸다면 얻지 못했을 감자다. 거꾸로 심었다가 다시 심은 감자는 세 배가 넘는 양으로 돌아왔다. 엄마네 감자가 생각나 전화드리니 지금 캐면 자잘한 것 밖에 없다며 조금 더 놔두신단다. 가을 감자 얘기를 하니 거꾸로 심었던 걸 다시 놀리며 웃으신다.
" 그런 얘긴 또 어떻게 알았니?ㅎㅎㅎ 너 내년엔 감자 많이 캐겠다."
그나저나 감자양이 많지 않아서 아들네 주고 나면 친구들에게 줄 게 없겠다. 친구들은 내년을 기약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