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아침부터 햇빛이 이글거렸다. 뜨거운 햇살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오늘 죽었군!
예상대로 엄마의 집은 정글이었다. 집 한편의 밭은 약 50평 남짓이지만 집을 둘러싼 사방이 모두 엄마의 밭이다. 집 뒤쪽 그늘 진 곳에는 딸기와 취나물, 돌나물, 참나물 등이 자리하고 해 잘 드는 쪽엔 마늘, 양파를 비롯해 곳곳에 부추, 상추, 토마토 등이 있다. 한 달 전에 내가 심어놓은 감자,고추, 양배추, 브로콜리 등도 잘 자라고 있다. 수돗가 주변과 석축 아래엔 미나리와 이름 모를 나물 무엇이 있고 밭 가장자리엔 소나무, 복숭아, 앵두, 라일락, 두릅나무가 있고 그 아래 그늘엔 붓꽃이 피었다. 집 입구엔 루드베키아가 한창인데 루드베키아 사이로 개망초 꽃이 가득 섞여있었다. 루드베키아 꽃밭인지 개망초 꽃밭인지 모르겠다.
"동네에서 욕하겠다."
"왜?"
"잡초 우거진 집이라고. 자식들이 엄마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 아냐."
"얘, 그런 소리 마라. 우리 집 다 좋아해. 꽃 많다고."
"꽃밭인지 잡초밭인지 모르겠구먼."
"개망초 뽑지 말고 놔둬. 나는 매일 그거 보면서 얼마나 좋은데."
"네~~ 그렇게 하셔요. 뱀 나와두 난 몰러유."
"뱀 나오면 나한테 맡겨. ㅋㅋㅋㅋ작년에 막내 뱀한테 물려서 병원 갔잖아. ㅋㅋㅋㅋ"
"아이고, 오마니. 웃음이 나와유?"
"ㅋㅋㅋㅋㅋ 안 죽어. 어머나, 문서방, 그거 놔두게."
엄마 몰래 개망초를 뽑고 있던 남편에게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남편은 사람 좋게 "네" 하면서 허리만큼 자란 개망초를 슬쩍 몇 개 더 뽑는다.
가져간 예초기와 잔디깎이로 주변 풀을 정리하고 산발을 한 잔디도 깎아주었다. 땀이 너무 흘러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수건을 이마에 묶으니 금방 축축해진다. 한 움큼 풀을 잡아 뜯다가 금잔화가 뽑혀버렸다. 엄마가 보기 전에 슬쩍 버리려고 했는데 벌써 보고 계셨는지 뽑힌 금잔화를 집어다 물에 담가 두신다.
도대체 온통 여기저기 꽃들이다. 자연 발아한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흙이 있는 모든 곳에 꽃들이 흩어져 있다. 고추 사이에도 꽃이 있고 부추보다 금잔화가 더 많다. 꽃은 꽃대로 한 데 모아놓자는 것을 엄마가 거부했을 때 못 들은 척 그냥 그렇게 할걸. 이게 밭이냐 꽃밭이냐. 엄마의 밭은 잡초도 꽃도 작물도 한데 섞여 모두 잘 자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잘들도 자라는군. 잡초를 뽑기 전에 꽃이 딸려 뽑히지 않는지 조심스러워 손이 더뎠다.
"저기, 할머니. 일 하는 환경이 너무 안 좋네요. 꽃들 때문에 일도 더디고 궁뎅이 붙일 데도 없고 괴롭구먼유."
"헤헤, 미안해유. 그치만 밭이 예쁘쥬?"
"음... 제 취향은 아니군요.ㅋㅋㅋ"
"이리 와 이거나 마셔유."
밭작물들 사이로 제 멋대로 피어있는 꽃들이 엄마에겐 성가신 것이 아니라 기쁨이다. 딸과 만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엄마는 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고춧대를 묶고 나니 마늘을 뽑아야 한단다.
"어디가 마늘이래유? 안 보이는디"
"잘 봐유. 거가 다 마늘이예유."
자세히 보니 우거진 잡초 사이에 끝이 꺼멓게 죽은 마늘이 보인다. 쑥 뽑으니 하얀 몸통이 딸려 나오는데 제법 실하다. 하나를 뽑고 보니 마늘이 보인다. 잡초를 뽑아가며 거둔 마늘이 꽤 많다. 한아름 안고 나르길 여러 차례. 어깨가 아프고 허리를 펼 수가 없다. 왼쪽 무릎이 슬슬 걱정이 되었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나오는 '아이고' 소리를 묵음으로 삼켜 집어넣었다. 엄마는 그새 양파를 다듬어 망에 담아놓고 마늘 앞에 앉아계신다.
"아유, 이쁘지 않니?"
"죽을 거 같아유. 이렇게 힘든 거 10년 만이예유."
"ㅎㅎㅎ 선상님이 일을 잘 못 해서 더 힘들어유."
엄마는 91세의 고령에다 천식 환자다. 감자 심는다고 하시다가 허리를 다쳐서 보호장구까지 착용했는데 덥다, 힘들다는 말 하나 없다. 딸내미는 죽네, 사네, 사 먹으면 될 것을 뭔 농사냐, 궁시렁대는데 멀끔해지는 밭과 거두어들인 수확물들을 보고 연신 웃으신다. 하지 마라, 이 농사 결국 자식들이 해야 하는데 누가 하느냐, 하는 말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다 들어간다. 잡초도 예쁘다고 하는 분께. 그래, 엄마가 무리해서 밭을 돌보는 것도 올 해가 마지막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웃고 있는 엄마를 보니 할 말이 없어진다.
"어머, 너 왜 나왔니? 더운데."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지렁이에게 하는 말이다. 흙을 덮어주고 물을 뿌려주는 엄마.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할 일이 남았지만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큰일 했다며 등을 두드려 주시는 엄마.
"엄마, 좋아? 아유 해피?"
"해피~~^^ "
지는 해를 등지고 웃으시며 햇양파를 한 보따리 내미신다. 마늘은 손질해 놓을 테니 다음에 와서 가져가란다. 집에 와 양파를 보며 생각한다.
내년에도 이걸 먹을 수 있으려나 어쩌려나.... 감자는 또 언제 캐고.... 아, 배추도 심는다고 했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거 같다. 아이고.... 우리 오마니, 해피하면 된 거지...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