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그림일기 2
여름을 싫어한다. 더위를 많이 타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말에 의하면 형제들에겐 어릴 때 보약을 많이 먹였는데 나에게만 안 먹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유난히 더위를 탄다는 거다. 뭐,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만 나는 요즘처럼 이렇게 더우면 딱 죽고 싶다. 심지어 수영장도 덥다.
오늘도 푹푹 찐다. 아침마다 우리 집 개와 함께 집을 나설 때마다 무섭다. 38도라고 했다. 온몸을 휘감는 불기운에 둘 다 머뭇거렸다. 나란히 뽕나무 그늘에 서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고맙게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볼일을 보는 우리 집 개.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마당 그늘 속으로 얼른 들어왔다. 아침이라 그늘은 제법 견딜만하다. 댕댕이 투투는 그늘진 잔디에서 2차 볼일을 보고 나는 그 옆 파라솔 아래에서 편성준 작가님의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를 마저 읽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떨어져 제주에서 한 달살이를 하는 내용이다. 아내의 짧은 일기가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떨어져 지내는 두 부부의 끈끈한 정이 느껴진다. 작가는 이 한 달살이를 통해 책을 냈고 그 내용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밥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아내와 전화 통화를 했다, 곶자왈을 산책했다, 카페에서 무슨 책을 읽었다 등이다. 가볍고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이다. 나도 이렇게 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깊은 문장 하나가 툭 나오고 그 문장엔 작가의 독서력과 연극과 영화에 대한 경험과 통찰이 담겨 있다. 작가의 지인이 "가벼운 무거움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평가에 동의한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 이 폭염에 딱 읽을만한 책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 고독을 선택한다는 것은 온 우주와 단독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고독은 이다지도 관념적인 동시에 실존적인 개념이다."(편성준, 윤혜자,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
마음에 닿은 문장들을 독서 노트에 옮기며 책을 덮었다. 옮긴 문장들은 내게로 와 나의 양식이 된다. 아, 그래서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했나? 이 진부한 말을 인용할 줄이야. 진부하다고 폄하하면 진짜 진부한 정신이 되어 버린다. 진부한 것은 오래되고 널리 알려져서 참신하지 않은 것일 뿐. 진부한 말은 쉽게 버릴 수 없는 뼈대다. 진짜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식이 된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아시리라.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고 나는 브런치에 글을 썼었다.(브런치북 <색연필 그림일기 2>에 있음 - '배추전이 먹고 싶었는데') 글이 너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된 단어들이 참 예뻤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 여자들은 전형적인 남성 권위주의에 짓눌린 불행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너무 아프고 그 아픈 이야기를 그토록 예쁜 단어와 따뜻한 정서로 그려내는 작가에게 마음을 뺏겼다. 그녀의 책은 내 문체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고인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이미 세상을 떴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폭염이 계속되면서 그녀가 생각났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언제든 만나면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에게 문자로 별일 없냐 하며 소식을 전하듯 그녀의 글이 읽고 싶었다. 밀리엔 책이 없어서 도서관으로 갔다. 42도의 온도가 표시된 차를 타며 이 온도 실화냐, 혀를 내두르며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를 빌려왔다. 38도라는 날에 42도까지 올라간 차의 내부 온도를 보며 오다 보니 빌린 책의 제목이 마치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에이, 김서령 작가를 "뭘 이렇게 사랑까지 하고 그래."
김서령 작가의 편집장은 그가 세상을 떴을 때 '한 문장이 졌다'라고 했다. 나는 그 글을 읽고 눈물이 나서 참다가 결국 찔끔찔끔 울고 말았다. 훌륭한 글이야 많지만 김서령 작가의 문장은 내게 특별하다. 그녀의 다정하고 따뜻한 문체는 내가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글에는 유머가 넘치는데 '미오기전'의 김미옥 작가와는 또 다른 유머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 '애자'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의 등장인물인 노처녀 작가가 병든 엄마를 지키며 담배를 피우고 거지깡갱이 같은 차림으로 다닌다. 딸은 죽음을 앞둔 엄마와 마지막이 될 여행을 가고 죽어가는 엄마에게 "엄마도 엄마를 위해서 살라"고 언성을 높인다. 영화를 보던 김서령 작가의 엄마는 영화 속 등장인물에게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시집이나 가라, 이년아." 한 마디 한다. 엄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함께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그 소리를 들었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누군가 박수를 쳤고 곧 관객들이 모두 엄마에게 박수를 쳐 준다. "창피해서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라고 작가는 썼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키득거리고 웃었다. 더위 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키득거리고 웃었다. 이런 대목이 많다. 마흔에 혼전 임신을 한 작가는 서둘러 결혼을 하는데 딸의 결혼을 통보받은 엄마는 다 늙어 뭔 결혼을 하냐며 꼭 해야겠냐고 묻는다. 엄마가 살아보니 남자는 점점 귀찮고 애새끼도 필요 없어진다며.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엔 엄마의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우리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 집에 가면 대체로 나는 일을 많이 한다. 고령에다 천식이 지병인 엄마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다. 그럼에도 일을 하는 내게 하지 말라고 한다.
"정말 하지 마? 일이 이렇게 많은데 누가 하라고 어떻게 안 해"
"아유, 하지 말래도. 안 해도 된다는데...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몰라. 너 귀찮게. "
"엄마, 맘에도 없는 말 하지 마셔."
"아이, 얘, ㅎㅎㅎ 너 힘들까 봐 그러지... 그럼 안 해도 되는데... 비닐을 묶어서 좀 버려야 되고 마늘 밭 좀 갈아야 돼. 배추 심으려면...."
일하지 말라는 말이 진심인지 의심이 간다. 친구들에게 가끔 엄마 이야기를 하면 나는 분명 엄마 흉을 보았는데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웃곤 한다. 우리 엄마가 귀엽다며 꼭 좀 만나보고 싶단다.
폭염이 기승인 여름날이다. 매일 서너 개의 안전문자가 온다. 밖으로 나가지 말란다. 산책이라면 환장하는 우리 집 개조차도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한다. 더위를 견디는 게 괴로우면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폭염을 견디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또 죄책감이 든다. 더위 때문에 죽고 싶어 하면서 죄책감까지 드는 그런 날은 책을 읽는다. 가볍지만 무거운 글과 따뜻하고 다정한 언어로 외로움을 돌보며 유머 가득한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