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e, I'm aging
두둥등장. 글을 다시 쓴다는 건 슬픈 일이다.
최근에는 나 홀로 심리분석 놀이 중.
특히, 융합이라는 개념에 한 걸음 다가선 건,
그간 지켜봐 온 지나친 의존성을 건강한 독립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건강한 융합의 개념은 팀 단위로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융합은 개인이 타인으로부터 결속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완성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때 대상 간 추구하는 계약이 깨질 경우 대상은 계약을 깬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적대적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융합 관계를 맺으며 이를 어겼다고 하는 대상은 일종의 죄책감/죄의식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흔히 부모관계, 부부관계에서 나타나는 미성숙한 모습이다.
불완전한 융합 관계를 주도하는 이는 흔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해 존재 자체에 대한 독립성을 기르기 위한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
지나친 공동체주의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모순인데, 이를 모순이라 표현하는 까닭은 공동체의 존재 자체가 개인의 영역을 보다 확장하기 위해 맺는 일종의 책임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동체는 개인 존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를 역전한 현상이 불완전한 융합이다.
조금 더 확장해보자.
이는 정치가 감정의 정치로 바뀌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정당적 차원의 결정 시 개인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에 대한 기대치가 공동체를 지배한다.
당파적 충돌 시 주류의 의견만이 수용되는 사례로 연결되며, 이는 조직을 갉아먹는 토대가 된다.
선택에 있어 감정이 주를 이루는 관계는 반드시 그릇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반면, 감정의 기류를 어떻게 이끌 수 있느냐가 선택권을 좌우할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다.
현대 정치는 너무 쉽게 표를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야당과 여당은 서로를 적으로 상정하며 비난을 일삼아 분노를 지지자들을 결속하는 힘으로 악용한다.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방식은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절대성을 갖는 효과가 있다.
절대성은 대화의 공간을 줄이고 관점을 좁힌다.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의제를 썩게 하는 독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다시 가족 공동체로 돌아가 보자.
공동체가 제대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 우선이며,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방식으로는 존중을 기반으로 한 대화여야만 한다.
감정적인 적대감에서 벗어나 이로운 융합을 도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