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랑
철학자로서 니체는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 사랑을 해서는 안 되는 지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까? 니체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은 친구 간의 우정이라 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벗을 만나고자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나’와 그 ‘나’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사이의 대화가 물속 깊이 가라앉지 못하도록 막는 코르크 같은 역할을 하는 벗을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벗과의 우정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속으로, 속으로 자꾸 침잠해져만 가는 스스로의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차라투스트라와의 우정을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에 예속 된 노예가 되거나 그 사랑으로 모든 걸 휘두르는 폭군이 되거나 그를 숭배하는 신도가 되거나 하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서 니체가 설정한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떠난 것이다.
니체는 특히 여성과의 사랑이 그렇다고 봤다. 니체는 여인의 가슴 속에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어서 여성은 우정을 나눌 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사랑을 알 뿐, 벗을 사귈 수 없다고 했다. 니체는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 뿐, 이타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특히 여성과의 사랑을 두고 한 말이다. 여성들이 하는 그 사랑이란 이기적인 소유욕 즉 상대방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간에, 흔히 하는 그런 사랑은 제대로 된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가 여인과의 사랑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니체는 여성과의 사랑에 실패했다. 그는 루 살로메와의 사랑을 시도하였으나,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스스로 그로부터 철수했다.
니체는 이러한 사랑에 관한 관점을 가지고 기존의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철학자들이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려고 할 뿐 그것을 힘으로 휘두르는 것을 통해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그 틀에 맞추려고 할 뿐 그 지혜와 개체로서 각각의 독립적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벗으로서 우정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 철학인데, 그들은 이러한 벗과 같은 철학을 하지 않고, 상대를 소유하고 자기와 동질화를 시키려고 하는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 할 뿐임을 비판하는 것이다. 사실 니체는 지혜 즉 진리라는 것 자체를 부인하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이 진리인가, 가 아니고 진리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니체는 철학자들이 특정한 관점으로 예컨대 정상인의 관점 혹은 남성의 관점 혹은 시민의 관점 혹은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 된 관점으로 어떤 것을 진리라고 재단하고 나아가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와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거나 그것을 넘어 거짓이라고 처단하는 폭력을 휘두른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규정하는 진리는 독단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마치 사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니체는 사랑을 기본적으로 상대를 강요하는 것이라 보았는데 그 태도는 철학자들이 이성이라는 것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자는 폭군처럼 이성을 사용하고 현실에서 벗어난 관념을 강요하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철학자와 철학을 신앙으로 숭배하고 따르면서 자기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니체에 의하면, 사랑은 상대와 나를 동일한 주체로 만드는 일, 독립적인 개체로 서지 않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예속 되어 한 편으로는 폭군이 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니체의 관점을 우리가 사는 현실로 가지고 와 실천해보면 그의 사랑에 대한 관점을 다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그의 사랑에 대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지혜 혹은 진리에 대한 관계로 연결되는 문제인 반면,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좀 더 자연스러운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철학에 대한 관계로서 말하는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 취할 것은 분명히 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은 예속적이어서는 안 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 독립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으로 내려오는 어떤 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남성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여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한다, 라는 말, 그것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 같은 것들이 전통으로 내려오는 강요된 도덕이다. 종교도 마찬가지고, 어떤 종류의 시스템이나 공동체의 질서 같은 틀도 마찬가지다. 좀 더 확장에서 말하자면 이성 중심의 규정, 정의와 같은 판단이나 목적에 의한 것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금과옥조로 따르고 지키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그러면서 그 안에서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노예와 폭군의 관계로서의 사랑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희생하는 헌신으로서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헐벗고, 굶더라도 그것을 아껴 아들에게 다 바치고 그 와중에 딸이라는 이유로 누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한 채 직장에 뛰어들어 남자 동생 고등고시 시험 합격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 세대가 지나온 길에는 숱하게 깔려 있다. 그 아름다운 가족 이야기는 항상 슬픈 이야기로 끝난 것만 보았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내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외할머니가 그런 인생을 살았다. 그들의 인생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프고 슬픈 가족사다. 그런 아름답지만 슬픈 그 가족사는 이젠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비극으로 우리에게 와 있다.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 돈과 권력이 들어섰다. 그 안에서 인간의 본질은 망각된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산다. 대중 속과의 일치감 속에서 개체로서 독립된 사랑은 없고, 돈과 권력으로 평준화 되면서 규격화 된다. 개인이 갖는 감성은 무가치 한 것으로 치부하여 오로지 부모가 강요하는 ‘너 잘 되라고’ 시키는 이성으로 판단한 목적 아래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서서히 죽어간다.
이런 풍경을 함 생각해 보자. 고구마 구운 것을 아내가 손이 데일 정도로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깐다. 그것을 남편은 쳐다보고 있고. 그 깐 고구마 알맹이를 남편에게 준다. 순간 그 모습을 본 딸이 한 마디 한다. 엄마는 왜 아빠한테 그렇게 굴종적으로 해? 그 순간, 남편이 숟가락으로 그 고구마를 반을 잘라 아내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일어서서 가서 마실 물도 떠다 준다. 부부는 사랑에 만족해하는데 반해 처다 보는 젊은 딸은 뭔가 불만이 차 있다. 남과 여를 역사적으로 해석해 적대 관계로 보아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일부인데...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다. 참으로 형제들이여, 그때가 오면 나는 다른 눈으로 내가 잃은 자들을 찾으리라. 또 다른 사랑으로 그대들을 사랑하리다라. 언젠가 그대들은 나의 벗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희망을 품은 아이들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면 나는 세 번째로 그대들과 함께 하면서 위대한 정오를 축복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베푸는 덕에 대하여
분명한 것이 아니고, 벗겨내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황혼이 아닌 새벽 놀을 향해 가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가는 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