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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May 06. 2021

모국어가 다른 엄마와 딸의 애로사항

고무장갑 끼고 등긁기

내게는 빈이라는 친구가 있다. 방만구 씨가 중국에서 유학을 할 때 베이징에서 만난 친구다. 빈은 한 살 무렵 부모님, 언니와 독일로 건너온 베트남 보트피플 2세이며 화교이다. 딸 둘을 데리고 베트남에서 독일로 건너온 빈의 부모님은 부지런히 아이를 낳아 총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둔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빈은 부모님이 둘다 베트남 사람이지만 베트남 말을 하지 못한다. 자식들 중 베트남 어를 하는 이는 큰언니 단 하나 뿐이다. 독일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부모님과 동행하여 병원이니 약국이니 학교를 다니며 어린 나이에 부모님 대신 의사소통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큰언니는 집안에서도 부모님과 동생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도우미로 살았다.


빈의 어머니는 자신과 가족들이 베트남에서 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했다. 어차피 그 뿌리는 화교이니 중국인이라고 사람들에게 얘기하며 살았고, 아이들도 베트남 아이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해서 당시 베트남 여자 아이들이 하고 다니던 단발머리 대신 머리를 기르게 했다. 물론 자식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푸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대화를 통해서이다. 자기가 몸담은 사회의 언어가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만큼 풀지 못한 스트레스가 쌓여있다는 것이다. 빈의 어머니는 독일말도 못하시는 데다 베트남 커뮤니티에 나가지도 않았고, 자식들이 많다 한들 자식들과 모국어가 아닌 서툰 독일말로 대화를 나누어야 했으니 그 인생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짐작이 간다.


자식의 언어가 능통하지 않은 부모와 부모의 언어가 능통하지 않은 자식 사이의 심도있는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상적인 대화야 가능하겠지만 심도있는 대화는 못하고 살았을 것라 생각되는데 사실인 즉 빈은 평생 엄마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어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외국인과 대화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외국어로 한 시간 이상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외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기브 앤 테이크가 잘 되어야 하는데, 한 쪽의 외국어 실력이 형편없다면 대화를 하는 상대방은 대화에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대화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적용되는 룰이다.


이해는 되지만 부모와 자식이 평생 심도있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내게 큰 쇼크를 안겨주었다. 사람이 태어나 어른이 되고 자식을 낳아 키우다 보면 사실 자식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식과 미주알 고주알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공감해주고 다독여주는 것. 이것이 결여된 인생이라면 그것을 과연 풍요로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빈네 형제들은 기본 머리가 있어서 그런지 다들 사회적으로 꽤 성공했다. 빈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대기업 매니저이고 큰언니는 미국에서 의사로 살고 있으며 다른 형제들도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다. 빈네 부모님으로서는 자식들이 많이 자랑스럽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은 허전하지 않을까. 전쟁통에 베트남에서 독일로 와서 풍요로운 삶을 얻은 대신 자식과의 살뜰한 대화를 잃었으니. 이것이 그 당시 많은 이민가정의 모습이겠지만.




고등학교때 대학입시 관련하여 엄마가 학교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우리반 근처 복도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던 엄마를 발견하고 한 아이가 내게 와서 느이 엄마 왔으니 나가보라고 했다. 그 아이가 웃으며 '느이 엄마 너랑 똑같이 생겨 한 눈에 알아봤어!' 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나와 엄마는 생긴 것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다. 사촌 언니에 의하면 우리는 심지어 걸음걸이도 똑같아서 멀리서 걸어오면 사람들은 내가 엄마인지 엄마가 나인지 헷깔린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는 죽이 잘 맞는 한 쌍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한 시간 이상 수다를 떤다. 그래서 엄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히 다 알고있다.


빚만 져서 가게문을 닫고 남편마저 암으로 떠나보낸 엄마 친구가 어떻게 친절한 회계사 사위를 보는 바람에 인생말년에 운이 핀 이야기, 주변에 농사지어서 돈번 사람이 거의 없는데 야무지게 농사지어서 빚 다 갚고 집까지 장만한 우리 숙모, 성공한 부모밑에서 곱게 자랐지만 성인이 돼서는 취업도 못한 친구 아들. 최근 소프트볼에 재미를 붙이신 아버지.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많은 편이다. 어려서 부터도 그랬다. 나는 엄마가 장보러 가면 꼭 엄마를 따라나서서 엄마에게 노래도 배우고 노래에 연관된 학창시절 얘기도 들었다. 엄마한테는 마을에서 하나뿐인 여고생이었다는 부심이 있다. 그 얘기를 할때마다 나는 귀하게 큰, 명문여고 타이틀까지 있는 엄마를 촌구석에서 이렇게 고생시킨다며 아빠를 원망하는 척한다. 그러면 엄마는 손사레를 치며 그러지 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당신 편들어주는 딸래미가 흡족한 모양새다.


그러면 나와 내 딸 미나와의 대화는 어떤 편인가.



원활하지가 않다.


최근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딸이 초등학교 5학년으로 아직 어려서 그런지 심층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실 심층대화를 해보려고 시도를 해도 결과가 매번 시원찮다. 말도 독일말과 한국말을 섞어서 하거나 내가 한국말로 물으면 미나가 단답형으로 독일말로 대답하는 수준이다. 한마디로 대화가 알차지가 않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미나와 나는 미나가 두살 반이 되던 해까지는 늘 한국말로만 대화를 했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집에서 애를 키우다 보니 미나의 한국말 수준이 독일말보다 훨씬 높았다. 사람들이 애가 한국말을 잘한다고 칭찬을 했고 나는 칭찬에 힘입어 이렇게 집에서 계속 한국말만 쓰면 애가 언젠가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런데 그것은 내 상상에 불과했다. 미나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하더니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한 문장 전체를 한국말로 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한국말과 독일말을 섞어서 했다. 대화의 시작은 한국말이지만 대화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독일말로 옮겨졌다.


미나가 하는 한국말을 들어보면 한국말 같긴 한데 한국사람들은 그 의미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문장의 핵심이 되는 명사를 거의 독일말로 구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상도 사투리까지 섞어서. 예를 들어,


미나 :    

엄마, 오늘 학교에서 마테할때 게오 드라이엑 찾으려고 슐란쩬을 봤는데 니히트 게푼덴. 프라우 카페스가 다음부터 게오 드라이엑 안가져오면 지 쉭트 운스 나흐 하우제.


나:        

프라우 카페스가 학부모한테 이메일을 써서 마테할때 게오 드라이엑이랑 지르켈 가지고 오라고 쭈제쯔리히로 얘기했는데 그걸 안가져가면 어떻게해? 너 말고 또 누가 안가져왔어?


미나:

에밀리아 글라우베 이히.


이 대화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짐작이 되는가? 이 대화를 한국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가? 못알아 듣는다면 독일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는가? 없다. 독일말을 하는 한국사람말고는 이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런데 미나는 이것을 한국말이라고 구사한다.


문제는 미나가 자꾸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니 나도 미나를 배려해서 독일말과 한국말을 섞어서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독일말의 비중은 미나가 커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대화에서 독일말을 더 섞지 않으면 미나가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 그렇게 될 수록 미나는 엄마와의 대화에서 흥미를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저께 저녁답에 미나와 방만구 씨가 싸웠다. 둘이 같이 넷플릭스를 보다가 볼륨조절 문제를 가지고 싸우다가 미나가 리모콘을 들고 달아난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미나는 방만구 씨에게 혼이 났다. 그날 밤 우리는 둘이서 방만구 씨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상대가 남편이든 아빠든 상관없이 뒷담화라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기 마련이다. 재미있어서 집중하게된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심층적으로 얘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다. 방만구 씨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심통을 부린 일을을 다 들추어 내서 뒷담화를 했다. 1시간이 넘도록, 밤 10시가 되도록 엄마와 딸이 일치단결하여.


독일말로.


나는 내가 그나마 독일어를 할 수 있어서 독일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딸과 함께 누구의 뒷담화를 할 수 있는 건 다행이라 생각은 하지만, 늘 그 끝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남편의 뒷담화를 해서가 아니라 뒷담화를 한국말이 아닌 독일말로 해서다. 내가 독일말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봤자 독일말은 나의 모국어가 아니기에 독일어로 대화하는 것은 내게는 고무장갑을 끼고 등을 긁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등이 가려워서 미칠 것 같을 때는 고무장갑을 낀 손이 아닌 손톱이 달린 맨 손가락으로 손톱자국이 등짝에 빨갛게 생기도록 빡빡 긁어야 속이 시원한 것이다. 욕도 마찬가지다. '아' 다르고 '어'다른 어감차이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모국어로 해야 속이 시원한 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인정해야할 것은 인정하련다. 내가 조금 더 독일말을 연마해서 미나와 더 원활하게 대화하는 것이 미나가 한국말을 배워서 나와 원활하게 대화하는 것보다 빠르겠다는 것을. 설사 미나가 커서 한국대학의 어느 부속 어학당에 들어가 한국어를 연마한다고 해도 미나와 내가 한국어로 속시원하게 대화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내 소원대로 미나와 내가 한국어로 대화를 한다고 한들 그 대화는 미나에게 고무장갑을 끼고 등을 긁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대화가 한국어로 이루어지든 독일어로 이루어지든, 둘중 하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등을 긁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것이 모국어가 다른 엄마와 딸의 애로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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