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페시아 X'
늘 모든 것이 완전할 수는 없다. 어떤 존재든 어딘가에 결핍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이제껏 연재를 해 오며 시베리안 허스키와 함께하는 삶의 매력과 즐거움을 전하는 동시에 그러한 삶에 수반되는 고충과 희생도 함께 전달하려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제노의 보호자이자 아빠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견종과 우리 제노에 관한 예쁜 이야기만 전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더할 것이다.
그러나 허스키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정보가 부족하고 알면 알수록 관리에 부단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견종에 대해 그럴듯한 말, 과장된 표현으로 곱고 예쁜 이야기들만을 전달했다가 무턱대고 녀석들을 입양하는 분들이 단 한 분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다. 물론 글 한두 편을 읽고 이런 거대한 생물체를 가족으로 맞이하는 분들이 흔치는 않을 것이나, 이 연재 글들로 인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견주와 고통받는 허스키가 늘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기우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이번 30화에서는 제노의 약점, 나아가 시베리안 허스키들이 공통적으로 겪을 수 있는 약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이렇게 쓰기로 결심해놓고도 이제까지의 모든 연재 글들 중 키보드에 손이 선뜻 가지 않던, 글이 손목 근처에서 주저주저하며 손가락 끝으로 나아가지 못해 시간을 가장 오래 끈 주제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낳은 아들내미가 세상에 태어나 겪고 있는 고충을 직접 소개한다는 것이 심적으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행하기로 한 이유는 비슷한 상황을 겪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해결책으로 연결될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전달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단어 alopecia(알로페시아)는 탈모증세를 뜻한다. 그리고 뒤에 붙는 'X'라는 알파벳은 '원인 불명'을 뜻한다. 합쳐서 alopecia X, 즉 '원인 불명의 탈모증'이다.
이러한 탈모증은 주로 특정 견종들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증세를 앓는 견종들 중 다수는 이중모 구성의 피모를 가진 견종들이지만 단모종, 장모종 등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도 한다. 흔히 알로페시아 X 증상을 겪는 견종들로는 내피모가 빽빽한 시베리안 허스키, 사모예드, 알래스칸 말라뮤트 등이 있으며 국내에서 많이 기르는 견종으로는 포메라니안 등이 있다.
본래 내측모 안쪽의 피부 색깔은 밝은 핑크빛이지만 알로페시아 증상이 발생하면 해당 부위의 털이 빠지거나 점차 성글어지는 증상과 함께 피부가 검게(혹은 짙은 회색)으로 변한다. 작은 부위에서 탈모와 피부색의 침착이 시작되어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가며, 아무런 치료 없이 그대로 방치해두는 경우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목 위쪽을 제외한 전신의 탈모와 피부색이 침착되는 지경에 이른다.
다음은 이른바 반려견 탈모 증상으로 알려진 알로페시아 X를 앓는 사례들이다.
물론 제노가 겪는 탈모증이 위 사진들에서처럼 심각한 정도로 번지고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콩알만 하던 부위가 1~2개월에 걸쳐 다리 하나를 통째로 불에 그을린 것처럼 뒤바꿔 놓을 만큼 상황은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든 치료하고 회복시켜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번져가는 들불을 어찌어찌 겨우 막아낸 것이었다. 만일 조금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치했다면 어쩌면 수개월 새에 제노도 위 사진의 중증 탈모증을 겪는 안타까운 사례들의 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증상명에 붙은 'X'가 드러내듯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수의학자들은 호르몬 불균형 및 성 호르몬 분비 계통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생기는 문제일 수 있다고 말한다.
제노의 경우 이러한 증상이 처음 시작된 것은 오른쪽 뒷다리에 난 옥수수 한 알 정도 크기의 뾰루지였다. 잠시 일이 있어 호텔링을 맡겨둔 곳에서 제노를 데려온 날 밤, 제노가 오른쪽 뒷다리의 털을 물어뜯은 흔적이 보였다. 아무래도 호텔링 업체에서 이런저런 간식을 가리지 않고 급여한 탓에(추정) 무언가가 피부에 올라온 듯했다. 제노는 그 부위가 가려웠던 모양인지 입으로 털을 뽑아내고는 계속해 핥아댔고, 상처 부위는 계속된 자극으로 소량의 출혈이 생길 정도였다.
나는 곧바로 제노를 동물병원에 데려갔고, 연고 처방과 함께 약을 바를 수 있도록 상처 근처 부위의 털을 일정 부분 삭모하게 되었다. 상처 부위를 핥지 못하도록 의료용 고깔을 착용했으나 직경 20cm, 30cm짜리 고깔도 제노의 긴 주둥이를 막기에는 무리였다. 삭모된 부분을 끊임없이 핥는 바람에 계란만 했던 삭모 부위는 점차 넓어져갔고, 핑크빛이었던 피부는 점차 검게 변해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증상이 번지고 있었다. 새끼손톱만 했던 자리가 점차 넓어지고 피부색이 침착되면서 오른쪽 뒷다리 전체가 시커멓게, 그리고 윤기가 흐르던 은빛 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처음 뾰루지가 났던 것이 지난 12월이었으니,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완치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간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다. 사료, 피모 영양제, 연고, 40cm 고깔, 입마개, 스프레이 등등등 털북숭이가 아니게 되어가는 아들내미를 보면서 절박한 마음에 내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동물병원에서도, 전문가들에게 온갖 자문을 구해도, 온갖 전문 서적을 뒤져도 알로페시아 엑스니 뭐니 원인이 불명이라는 소리만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노의 경우 삭모를 통해 드러난 피부를 지속적으로 핥으면서 증상이 악화되었고, 해당 부위와는 별개로 꼬리와 등 쪽에서도 동일한 증상이 소규모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노가 이빨로 건드렸다거나 다소 거친 표면의 하네스를 밀착하여 착용하면서부터 시작된 증상이었다. 즉 제노의 경우 탈모증이 촉발된 계기는 전적으로 외부적인 자극이 피부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면서부터였던 것이다.
국내에서 많이 기르는 포메라니안 견종의 경우, 가위나 면도기를 통한 미용 뒤부터 이러한 증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제노의 사례를 바탕으로 어디까지나 전문가가 아닌 나만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호르몬의 불균형과 같은 원인이 아닐 경우, 빽빽한 내측모에 피부가 늘 보호받는 견종들은 외부적인 자극이 피부에 직접적으로 가해졌을 경우 타 견종들에 비해 받는 충격과 자극을 크게 받아들여 피부 조직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보였다.
쉽게 말해 워낙 빽빽한 털로 보호받는 피부이다 보니 연약한 동시에 외부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어떤 연유로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자극을 받게 되면 그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여 촉발되는 증상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제노의 경우를 놓고 보면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요즘 안아키니 뭐니 말들이 많은데, 노파심에 언급해두지만 나는 한 달에 한 차례씩 제노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심장사상충 외부기생충 접종도 꼬박꼬박 하는 견주다. 다만 점차 검게 털을 모두 잃으며 변해가는 자식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다급한 마음이 '원인 불명, 치료법 특정 불가- 이것저것 시도해보아야 함'이라고밖에 답해줄 수 없는 전문가들의 입장과 만나면, 부모로서 자식에게 닥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나름의 진단과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또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이는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그리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부모이자 반려견의 보호자인 나의 온전한 책임 영역이니까.
수많은 자료와 사례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완치까지는 아니어도 탈모와 피부 변색 증상을 다소나마 완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접하게 되었다. 혹여나 제노와 같은 증상을 겪는 분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앞으로 나와 같은 일을 겪게 될 견주 분들이 생긴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 치료법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물론 제노의 증상이 완화되고 호전되어 회복세로 돌아서도록 만든 내 혼신과 집념의 잡종 치료법도 전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소개할 셈이다.
[중성화]
성호르몬 분비 관련한 문제가 알로페시아 증상의 원인인 경우 중성화를 통해 탈모 증세가 뚜렷하게 완화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고 한다. 제노의 경우 이미 중성화 수술을 하고 난 한참 뒤에 증상이 나타났으므로 중성화를 하지 않아서 생긴 내분비 계통의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로페시아 증상이 나타났을 때 중성화 수술을 하나의 치료 방식으로 간주한다.
[피부 연고]
제노가 가장 효과를 많이 본 치료법이다. 동물의 외상, 화상으로 인한 피부 재생을 돕기 위한 연고로서 국내에서는 따로 구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미국 아마존을 통해 구입했다. 젤 타입과 분사 스프레이 방식이 있으며 패키지로 구매할 경우 젤 타입은 개당 약 20달러, 스프레이 타입은 약 25달러 정도이다. 둘 다 사용해 본 결과 스프레이 식이 상당히 편하고 바르는 데 드는 노력을 절감할 수 있음에도 젤 타입이 훨씬 오래 사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가격대 성능비가 상대적으로 탁월한 편이었다. 스프레이 분사식은 몇 차례 쓰지 못하고 금방 통이 바닥났고, 젤 타입에 비해 약품이 농축되어 있어 상처 주변부의 피모에 닿으면 엉겨 붙어 상당히 지저분해지곤 했다.
젤 타입은 하루 세 차례, 8시간마다 한 번씩 발병 부위에 면봉으로 고르게 펴 발라주면 된다. 스프레이 타입은 하루 5~6회씩 부위에 뿌려만 주면 된다. 선택은 견주의 몫이지만 개인적으로 덜 자주 발라도 되고 가성비가 탁월한 젤 타입을 선호한다.
[피모 영양제]
사실 이건 피모의 관리와 유지에 도움이 되는 보조 기능의 영양제로서 사실 제노의 탈모증 치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사료가 피모의 건강을 유지할 만큼 충분하고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또한 호르몬 분비에 있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영양적인 측면에서 탈모 증상에 기여할 수 있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보조적인 방책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하루 한 차례 적당량을 사료에 섞어 급여한다. 제노에게 급여하는 영양제는 mybeau(마이뷰) 스킨&헤어 제품이다.
[사료]
탈모 증상을 겪는 해외의 허스키 견주들의 사례를 살펴보다가 가장 낮은 등급의 저가 사료를 급여하다가 영양 균형이 잘 잡히고 좋은 원료를 사용하는 사료로 바꾼 뒤로 증상이 뚜렷하게 완화되었다는 이야기가 몇 있었다. 이는 역시 영양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과 균형을 바로잡는 부분이므로 피모 영양제와 맥락을 함께한다. 자신의 견종에 가장 알맞고 균형 잡힌 영양소가 고루 담긴 사료를 꼭 급여하도록 하자. 제노에게 급여하는 주 사료는 웰니스코어 오션포뮬라 제품이다. 이제껏 비싼 것부터 기호성 높은 것까지 총 30종 이상의 사료를 급여해 본 결과 시베리안 허스키 성견에게 이보다 적합한 사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허스키 자견이라면 웰니스코어 퍼피 제품을 추천한다.(전혀 광고와 무관하다. 이제껏 수십 자루를 주문해-10~12킬로짜리 대형 포대자루로 주문해야 하므로..- 제노에게 먹이고 요즘은 제노의 절친인 닉에게도 먹이면서 체험한 경험담이다)
[멜라토닌 처방]
직접적으로 약을 투여하면서 탈모증의 완화를 유도하는 치료법은 사실상 마지막 수단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 수의학회에서 알로페시아 X 증상에 대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약물들이 몇몇 소개되어 있지만 이는 반려견에게 있어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으므로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고도 적혀 있다. 그러한 극단적인 약물치료를 감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희망의 끈이 바로 멜라토닌 처방이다. 예전에는 국내에서도 쉽게 영양 보조제나 수면 유도 보조제 등으로 구할 수 있었지만 수년 전부터 의약품으로 지정되면서 상당히 구하기가 까다로워졌다(직구도 통관 불가). 실제로 이 멜라토닌 처방은 알로페시아 증상을 겪는 견주들이 꼭 시도하게 되는 치료법으로 약 40~50%의 경우 탈모 및 변색 증상이 상당 부분 완화되는 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외국에서는 멜라토닌을 일반 영양보조제로 분류하므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동물병원을 통해서도 멜라토닌 처방을 받을 수는 있다.
다만 이 치료법은 자가 치유를 유도하는 것이 아닌 피모 생성을 촉진시키는 호르몬 분비를 유발하는 방식이므로 가능하다면 피부 치료 연고, 사료, 영양제, 중성화 등의 치료법들을 고려해 본 뒤에 마지막으로 시도해보는 편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가장 중요한-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이게 지켜지지 않는다면 위의 모든 치료법이 다 무의미하다. 콩알만 하던 상처가 다리 전체로 퍼지고 전신으로 퍼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계속해서 반려견이 이상 증상이 발생한 부위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가렵기도 하고, 털이 있던 부위가 맨들맨들해지니 그 이질감에 계속 흥미를 가지고 핥아대면서 상태를 악화시키는데, 이를 방치하면 산불에 소방헬기로 기름을 뿌리는 격이 된다. 제노의 알로페시아 증상이 커진 데에는 녀석의 혓바닥이 일등공신이었다. 이를 그대로 방치하여 병원을 찾게 되는 녀석들을 보면 털이 빠지고 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된 자극으로 피부에서 끊임없이 출혈이 생기고 급기야는 피부조직이 회복불능 상태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들이 가려워하는 모습이 딱해도 건드리게 놔두어선 안 된다. 이는 어린아이들이 아토피나 수두를 앓고 있는데 잔뜩 독이 오른 손톱으로 마구 긁게 내버려 두어 평생 남을 흉터를 남기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환부를 반려견용 탄력붕대로 감싸 놓기, 의료용 고깔 사용하기, 의료용 입마개 사용하기 등 각자 반려견의 상황에 알맞은 방식을 택하면 된다. 제노의 경우 탄력붕대가 제대로 고정되어 있을 수가 없는 다리 부위여서 붕대로 환부를 보호하는 방식을 시도해볼 수 없었다. 의료용 고깔을 가장 큰 것을 사용해보았음에도 나중에는 몸을 기괴하게 비틀어서 다리를 고깔로 밀어 넣고 긴 주둥이로 환부를 핥는 바람에 실패였다(사실 고깔을 너무 믿어버려서 오랜 기간 몰래 핥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제노의 증상 악화에 가장 큰 실수였다). 고깔에 크게 데고 선회한 것이 의료용 입마개였다. 처음에는 아주 흡족했으나 의료용 입마개 사이의 틈으로 긴 혓바닥을 내뻗어 상처를 핥아대는 걸 보고 입마개 안쪽을 덧대어 이를 방지한 뒤에야 제노의 회복세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한 번 꽂힌 부위를 건드리고자 하는 반려견들의 집착은 상상 이상이어서,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또 좌절해야 했다.
몇 주동안 하루에 세 차례씩 빠짐없이 열심히 약을 바르고 비싼 영양제를 먹여가면서 겨우 조금 회복시켜놓았더니 잠깐 눈을 뗀 30분 사이에 질척하게 다 핥아서 피부가 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을 몇 차례나 경험했고, 그때마다 정말이지 분노가 정수리를 뚫고 승천한다는 심정이 무엇인지 체험했다. 솔직히 제노 입장에서도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겠는가. 가려워 죽겠는데, 궁금해 미치겠는데 손에 손싸개를 둘둘 감아둔 노릇이라니. 항상 냄새를 맡고 열을 방출해야 하는 반려견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정말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녀석이 입마개 착용으로 받을 스트레스를 고려해야 했다. 우선 산책을 한 차례 늘렸다. 녀석의 주의가 따분함 끝에 환부로 향해 건드리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산책 횟수뿐만 아니라 그 강도도 늘렸다. 저녁 산책 때에는 햇살이가 애지중지하는 고무공을 가지고 나가(제노/햇살이 엄마는 원래 제노에게 햇살이의 공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그냥 제노 공이 되어버렸다) 제노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지치게 만든 다음에야 귀가하기 시작했다.
운동량이 늘고, 충분히 지치니 제노도 점차 혼자 있는 시간에 입마개 착용하는 것에 적응을 해갔고 크게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놀아줄 거란 사실을, 간식도 충분히 먹여줄 거란 사실을, 물도 배변도 원할 때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인지시켜야 했다. 누군가 함께 있을 때,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입마개를 착용하지 않는다. 녀석이 입마개를 착용하는 시간은 밤에 잠자는 시간, 모두가 외출하는 잠깐 동안 정도가 전부다. 일단 회복세로 돌아서도 털이 올라오기 시작하니 녀석도 예전처럼 그 부위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아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물론 습관적인 부분은 남아 있지만 관심을 가질 때마다 다가가 해당 부위에 손을 얹고, "아니야"라고 말해주면 잘 따라주곤 한다.
아침 산책, 저녁 산책,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알로페시아 증상 부위에 연고를 발랐다. 시간이 너무 촉박할 때엔 스프레이를 쓱 뿌려주고 황급히 외출하기도 했다. 온 바닥에 연고를 묻히고 다니는 바람에 하루에도 두 번씩 걸레질을 해야 했지만 연고를 바르려고 함께 마주 앉을 때마다 지난번보다 조금 더 올라온 새하얀 털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완전히 매끈해진 검은 피부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한 3~4주간은 아무런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새카만 아스팔트에 물을 주면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다만 약물치료로 넘어가기 전에 최선을 다해보자, 건드리지 못하게 하면서 일단 어떻게든 계속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약 한 달 가까이 검은 피부에 열심히 연고를 빠짐없이 발라준 결과, 어느 날 검고 매끈하던 피부에 정말 정말 정말 미세한 솜털 몇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 주먹만 하던 환부의 한가운데서, 바로 콩알만 하게 뾰루지가 처음 올라와 가장 먼저 털이 빠졌던 바로 그 작은 지점부터 새하얀 털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뭉클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나의 어마어마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녀석을 회복시키기 위한 분투와 노력, 인내는 제노 엄마도 혀를 내두르며 인정할 정도였다. 또한 스스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노를 회복세로 돌려놓은 것이 다름 아닌 나의 피땀이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지만 그보다 더 노력하고 인내한 건 다름 아닌 제노 녀석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빠가 건드리지 말랬으니까,' '연고 바르는 동안 잠깐만 참으면 되니까', '얌전히 쉬고 있으면 놀아줄 거니까' 이렇게 생각하며 나의 엄격하고 혹독한, 그리고 마음 아픈 치료 과정을 묵묵히 따라와 준 제노가 대견하고 또 그 착함에 미안할 뿐이다.
사실 제노의 생후 2년 즈음부터는 이제 시베리안 허스키에 대해 알 만큼 알고 공부할 만큼 공부하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산책도 익숙해지고 일상생활도 점차 안정되어갔고, 제노 녀석의 눈빛만 보면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어린 딸 햇살이와도 상상 이상으로 잘 지내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음, 허스키에 대해 알 만큼 알았다'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다.
옥수수 한 알 만하던 뾰루지가 검은 들불이 되어 은빛 초목을 다 태우며 제노의 뒷다리 전체를 잠식해나가는 동안 나는 발만 동동 구를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발버둥 쳤지만 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원인은 불명이며 완치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에는 정말로 좌절스러웠다.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의 은빛이 전부 사라져 버리고 검게 변한 마트의 통닭 같은 모습의 커다란 강아지만 남게 될 것 같았으니까. 무서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무서웠고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무서웠다.
결국 답은 어떤 묘안이나 모범답안이 아닌, 원인이 불명이라면 너만을 위한 해결책을 찾겠다는 진심과 포기하지 않겠다는 끈기였다. 녀석을 어떻게든 회복시키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우리 부부가 굳게 다짐한 것은,
'녀석의 털이 다 빠지고 시커멓게 변해 흉물스럽게 바뀌어도 내겐 영원히 첫눈에 반한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김제노다. 어떤 모습이어도 녀석은 우리 부부가 마음으로 낳은 털북숭이 첫째 아들내미다. 털이 다 뽑힌 오골계의 모습이 된다고 해도 우리는 녀석의 마지막 날까지 매일 산책을 시키고 행복을 챙겨줄 테다.'
아무런 실마리도 없는 상황, 어쩔 수 없는 최악의 결과를 가정한 각오뿐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한 회복까지는 갈길이 멀다. 내측모 손실의 경우 완전한 회복까지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그만큼 민감하고, 회복이 어려운 부위다. 반대편 다리 쪽에도 아주 작게나마 알로페시아 증상이 보이고, 거친 표면의 하네스로 자극받은 등 부위에도 내측모가 손실된 부분이 있다. 모두 적당한 때가 오면, 오른쪽 뒷다리가 거의 회복되고 나면 천천히 다른 부위들도 치료를 시작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회복되어가는 제노의 모습은 틈틈이 전할 예정이다.
여기까지 제노를 회복시키느라 정말로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깨달았으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렇게 빈 부분은 조금씩 메워나가면서, 서로에 대해 더욱 알아가면서,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메워나가고 싶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산책을 마친 뒤 약을 바르고 입마개를 착용한 채 선풍기 앞에 곤히 잠든 제노와 나 자신에게 나직하게 읊조려 본다. "화이팅- 조금만 더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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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 제노의 인생템 (시베리안 허스키를 위한 물건들을 소개합니다)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I : '소풍'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II : '헤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