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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Nov 19. 2019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VI

'격조'


 긴 시간 글에서 멀어져 살았다. 틈날 때마다 꺼내들던 노트북이나 타블렛 대신 가제 손수건, 젖병, 기저귀, 산책줄, 과자, 킥보드, 유치원 가방으로 가득한 매일을 살았다. 퇴근 후 아이 셋(제노 포함)을 챙겨 겨우 꿈나라에 보내고 나면 키보드 앞에 앉을 여력은커녕 아무 데나 엎어져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고서야 새로운 형태의 삶에 익숙해진 것인지, 체력이 붙은 것인지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전처럼 많은 단어를 쏟아내 엮어내지는 못하겠지만 제노에 대한 이야기를 겨우나마 다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동안 잊고 계셨을, 혹은 제노 이야기를 기다려주셨을 분들에게 오랜만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전 잘 지냈어요♡"


"그간 격조했습니다"라고.




내게 있어 가족이란,


 가족 구성원이 늘어난다는 것은 가정을 책임지고 돌보는 부모의 입장에서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혼하니 혼자 살던 시절보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두 배로 늘었고, 제노를 데려오니 세 배로 늘었다. 햇살이가 태어나고서는 여덟 배가 되었으며, 별님이까지 등장하니 이젠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저 닥치는 일들만 감당하며 살아가기도 벅찼다.


 사실 이제 더 이상 결혼 이전, 제노 이전, 육아 이전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가, 가족 구성원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아직 미혼인 친구들에게 담담하게 풀어놓으면 다들 경악하곤 한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특별히 힘들다거나 버겁다고 느낀 적이 없었지만.


 물론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남는 체력은 없다. 매일같이 100% 이상을 소진하며 맞부딪혀야 하는 삶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삶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지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건 다름아닌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깨달음. 엄마, 햇살이, 별님이, 제노까지 함께 얽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곳이 나의 가장 큰 안식처이자, 직장이자, 전선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노 오빠 그리기에 재미를 붙인 햇살이'





제노 × 볼드 저널


 한동안 업무를 제외하고는 육아에 전념하는 삶을 살면서 여실히 깨달았다. 집필력이란 곧 체력과 정신의 여유라는 사실을. 제노와 햇살이를 양육하며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소재가 넉넉하다거나 당시에 더 재밌는 일들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럴 수 있는 정신적, 체력적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방금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제35화가 언제 올라왔었는지를 확인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써야지 써야지 마음속으로 늘 다짐했지만 별님이의 탄생을 비롯해 다사다난했던 작년과 파란만장한 올초를 넘기고 나니 어느덧 달력에서 연도만 +1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격조했구나 싶었다.


 올초 어떤 제의를 받게 되었다. 한 잡지사에서 반려 동물을 가족으로 맞아 함께 살아가는 '아빠'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것이었다. 도심에서 대형견을 기르면서 느끼는 점, 어린아이들과 함께 대형견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아빠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할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도 이 인터뷰에 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생활에 여력이 없어 연재를 중단한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 외에도 대형견, 나아가 제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믿었기 때문이다.


볼드저널 제12권에 연재된 이야기는 다음의 링크를 통해 접할 수 있다.


https://boldjournal.com/xe_blog/the-resolve-to-become-family




한 걸음 밖으로,


 사생활이 필요 이상으로 노출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별다른 sns 활동을 하지 않는 것도, 제노 이야기에 나 자신을 포함한 가족사진을 본문에 포함하지 않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볼드 저널의 인터뷰에 응한 것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큰 발걸음이었다. 스스로의 은둔 지향성에 반하는 용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실제로 산책을 나가면 허스키 견주분들, 또한 많은 반려견을 기르는 분들이 초면에도 제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시는 경우가 있다. 다음을 비롯한 뉴스 채널에서 이야기를 접하거나 시베리안 허스키가 화제가 될 때마다 여기저기 제노 이야기가 노출되는 모양이었다. 반갑고 기쁘기도 한 반면 이는 내게 다소의 부담이었다. 여전히 좀 더 책임감 있는 견주가 되지 못한 자신에, 부족한 보호자이자 아빠로서의 자신에 오히려 창피한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쌓여 긴 휴식기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나는 제37화로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를 마무리지으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도 작가의 서랍에 들어가 보면 제 37화가 종결미 넘치는 제목을 단 채 빈 문서로 저장되어 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무척이나 어색하고, 쑥스럽고, 또한 머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 제노 이야기를 써 나가기로 결심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반려견, 특히 대형견들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적정 수준 이상의 오해와 경계심이 넘쳐난다. 최근 몇 년 새 반려견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이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이나 개선책이 제시되지 못한 채 반려인과 비 반려인들의 혐오와 대립만 격화되었다.


반려견이 일으키는 문제의 원인이 95% 이상 견주, 즉 반려견을 기르고 훈육해야 하는 사람에 내재한다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반려인들은 물론 비 반려인 분들의 반려동물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조금이나마 더욱 조화롭고 평화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제노 이야기를 읽고 어느 강아지가 하루 한 번 산책을 더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더 알맞은 사료를 먹을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신속하게 수의사를 만나볼 수 있게 된다면, 또한 어느 견주가 반려동물의 배설물 처리를 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믿는다.






말로 메시지를 전하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실제로 어른이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닮아간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다그치면서 정작 자기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좌절감을 느끼고 어른은 어른대로 실망하기 마련이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내고,

올바른 것을 믿으며,

믿는 바 대로 살아가고,

살아가는 대로 신념을 세우며,

신념대로 당당하게 말하는,

그런 견주이자 아빠이자 인간이고자 부족하나마 계속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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