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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mianK Oct 22. 2020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 본편

보는내내 불편한 진실. 키치에 대하여.

<프라하의 봄 1988 -  필립 코프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결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처신한다. 이것은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언젠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혐오감을 갖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결점을 고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좋은 인간으로, 어쩌면 신과 비슷한 완전성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 즐거운 지식. 니체


[마지막 장면]
테레사 : “무슨 생각 해?”
토마스 :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
.....안개 자욱한 숲을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마지막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두 사람의 대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책이나 영화를 가볍게 즐기면 로맨틱한 사랑을 테마로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깊은 지적 탐험과 모험을 좋아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가벼움만을 희화화하여 덧없음을 내세우려 쓴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니체(망치를든 철학자)의 사상이라는 돋보기를 왼손에 쥔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그에게 전달 받은 망치로 무장했다. 나는 이제 밀란쿤데라 그의 작품을 해석해보려 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구조화된 우리의 관념들은 이내 불편한 감상으로 이끌 것이며 왼손의 돋보기로 들추어내고 오른손으로는 그 구조들을 깨내어 진실을 들춰내보겠다.

말의 목을 잡고 눈물흘리는 니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지식을 확장시키려면 지식의 근간인 기본지식이 필요하며. 돈을 모으려면 시드머니가 필요하고, 조금이라도 사랑에대해 이해하려면 사랑을 주고받는 경험해보아야 함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하기 전에 자신과 인간의 심리부터 파악해야 하듯 모든 학문에 있어서 그 중심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나는 니체를 좋아했고, 그래서 오래전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 이 작품은 너무 어려워서 읽는데 오래 걸렸다. 사실 이번 기회로 제대로 읽게 된 것이지 그전까지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오래 걸렸다. 이 작품이 사랑에 대한 책인지 정치와 권력을 비판하는 작품인지 정말 어려웠다. 결론은 둘 다였다.


나의 감상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하자면 스토리 자체보다는 현대철학의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대부분일듯 하다. 나는 작품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며 여러 가지 서적들과 논문들을 살펴보고 작문을 거치며 궁금증을 해결해가고 있다. 사실 내가 정말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친구들과의 대화와 우정 또는 사랑 관계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그들 개인마다 가진 고유 개성에 스스로 집중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 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성찰한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잊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라도 간직해야겠다고 여겨 이백여 페이지 넘게 정리하면서 나중을 위해 나를 위한 책을 엮어볼까 하고 대주제와 전체 시퀀스를 작성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게 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관념과 세상에 대한 통찰의 글들은 나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큰 후유증과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나의 지적 탐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친구의 부재로 외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내가 느끼고 바라보던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나는 큰 위로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나서 나는 며칠 동안 그 역작의 감상 후유증으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이 주제에 대한 글쓰기는 멈추게 되었다.


위대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 조차도 사랑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대화를 좋아하며, 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고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와 그 이유 작품을 통해 찾으러 간다.



[작품 속 인물관계도]

영화속 인물들을 보면 좀 더 기억하기 쉽지 않을까..


1. 토마시와 테레자

테레자(무거움) <-> 토마시(가벼움) 커플


2. 사비나와 프란츠

사비나(가벼움) <-> 프란츠(무거움) 커플


3. 토마시와 사비나(한 때 만났었음)

4. 카레닌 (테레자의 애완견)


[인물 묘사]

(1)  토마시(가벼움)

여성편력과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음. 잘나가는 외과의사. 소설에 묘사되진 않지만 잘생겼을 것.

개인의 욕망이자 외과의사의 숙명으로 100만분의 1의 다른 여성의 육체를 탐닉함

애착관계와 책임을 강하게 거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

토마시는 가벼움을 버리고 테레자와 함께 사랑의 무거움을 택하고 둘이 함께 시골로 가며 서로 행복해함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갖는 모순적이며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

테레자와 교통사고로 사망

 

(2)  테레자(무거움)

나만 바라봐 토마시!

어머니를 통해 물려받은 육체 한계의 불안함을 채워지지 않는 사랑으로 채우고자 함.

토마시의 삶을 이해하지만 매번 그의 머리에서 나는 다른 여자의 향기에 괴로워함

토마시는 가벼움을 버리고 테레자와 함께 사랑의 무거움을 택하고 둘이 함께 시골로 가며 서로 행복해함

무겁지만 토마시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른 남성을 통해 자신의 육체적 쾌락도 경험해봄

토마시와 교통사고로 사망


테레자와 그녀의 손에 놓인 안나 카레니나에 대하여

토마시와 테레자의 관계.. 안나카레리나와 브론스키와의 관계..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은 격정적일수록 좋은 것도, 순수한 것도 아니다. 특정한 누군가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강한 편견과 이기로 한껏 부풀어 있다. 그 편견은, 오직 그 사람만이 끓어오르는 이 열정에 답할 수 있으며 그만이 사랑의 감옥에서 나를 구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과 광신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상대가 돌아보지 않으면 절망적인 고뇌와 상심에 빠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설사 상대가 돌아봐 주었다 해도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환멸과 끝없는 욕구불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유는, 상대가 현실적으로 안겨주는 사랑보다 자신의 격정이 기대하는 광신적인 요구가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기 때문이다. –생성의 무죄. 니체”



“불안한 자는 사랑받길 갈구한다.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자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길 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스로를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지, 현재의 자신에 대해 강한 불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음으로써 이대로 괜찮다는 안도감을 조금이라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성의 무죄. 니체” 



(3) 사비나 (가벼움-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캐릭터)

결혼이 싫어. 아내의 삶이 싫어. 전통의 거부

자신을 지배할 수 없는 프란츠의 영혼을 보며 겉뿐인 근육을 보며, 남성성을 잃은 공작새와 같다고 생각.

지배받은 수 없음에 싫증. 프란츠의 확신은 그녀에게 역겨움으로 다가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가벼움을 남성의 무거움으로 눌러줄 수 있는 강한 운명을 꿈꾸고 있음.

프란츠에게 벗어나 미국으로 감

진실되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 진실은 관객을 전제로 한다. 남편, 부모, 아내 등의 역할 페르소나.

자신의 은밀성을 상실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만큼 가난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은밀성을 포기한 사람은 괴물인 사람이다.

공적인 것은 투명해야 하고, 사적인 것은 가장 은밀해야 한다. 뒤섞이면 엉망이 된다.

 

사비나와 토마시의 가벼움에 대하여

그들은 눈빛을 통해 서로의 욕망을 안다. 눈빛에서 나오는 그 격정적인 불꽃과 이내 뜨거워지는 그들의 손과 몸동작. 이는 인간을 떠난 보편적 동물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에서 격정을 느끼지만 서로가 원하는 방향의 사랑은 아닌 것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나는 그들의 격정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흔한 형태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타는 듯한 격정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도, 막상 손에 넣고 나면 그 열정과 흥미가 식어버린다. 그러고는 다시금 다른 닮은 것을 원한다. 거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하는가. 물론이다. 자신의 욕망만을 사랑해 마지않는 마음이 존재한다. –선악을 넘어서. 니체”


 

(4) 프란츠 (무거움-개인적으로 매력이 없는 캐릭터)

아내가 있음, 자신을 흠모하는 여학생과 동거

기존의 도덕 윤리의 탈피, 가족, 관계, 모든 배반 배신으로 또한 새로운 자신의 발견

의료봉사 중에 강도에게 죽음

사랑은 무겁게 묘사되나 사비나에게 그의 남성성은 가벼운 것이었다. 가족도 버리고 자신의 삶도 버리고 사비나를 찾아온 그의 삶을 보라. 그는 자신의 욕망만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

프란츠는 사비나가 아닌 그녀의 허상을 좇는 인물과 같다고 본다.


“남자들에게 매력 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마치 순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로, 게다가 모습이 흐릿하게만 보이는 유령과도 같은 신비한 존재로 있어라.

그러면 남자들의 욕망은 더없이 자극받는다. 남자들은 그녀의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어떤 영혼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지 언제까지고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이 같은 방법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

예컨대 배우는 상업적으로 계획된 허상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독재자나 사이비 종교의 교주는 이 같은 방법을 가장 악하게, 그러나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사비나와 프란츠의 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이 커플이 오히려 권력관계가 상실된 레즈비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남녀관계의 극에서의 합일적 섹슈얼함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관계에서 미셸 푸코의 권력관계를 상실한 산물로써 무가치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구조화하는 사회현상으로써 자신의 책임과 무거움을 상실한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더 이상 남성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사비나가 토마시에게 섹슈얼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 프란츠와 대비되어 재미있었다.


어떤 이들은 구조화되고 주입되는 사회적 관념에 맡겨 사랑의 상대를 그 조건에 맞추듯 고르곤 한다. 사비나와 프란츠 그들의 사랑 또한 그러했다. 사비나는 곧 자기 자신을 배신해버린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사비나에 대한 나의 생각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실되게 산다는 것은 관객을 전제로 한다. 남편, 부모, 아내 등의 역할 페르소나로써 말이다. 그래서 진실되게 산다는 것이 가장 거짓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가장 진실된 삶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의 은밀성을 상실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만큼 가난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은밀성을 포기한 사람은 괴물인 사람이다. - 밀란쿤데라"


공적인 것은 투명해야 하지만, 사적인 것은 가장 은밀해야 한다. 뒤섞이면 엉망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개인적이어야 하고, 가장은밀한 교류여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두 사람사이의 예술적 미학이며, 사회의 기대에만 부응하는 교제는 자기 존재에 대한 배반행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비나는 프란츠와의 교제로부터 자신을 배반했고, 그 역겨움을 이기지 못해 다시금 그를 떠난다. 사비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성장해가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다양한 주제들]

시대의 정치적 상황. 1968년 프라하의 봄.

토마시와 테레자의 첫 만남에서 그녀의 손에 든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강아지의 이름을 카레닌으로 지은 것.

토마시의 여성편력. 육체에 대한 100만 분의 1의 차이를 좇는 개인의 정체성 획득. 그 1을 포기하고 테레자와의 무거움(Es muse sein!)을 택하는 토마시. 그리고 삶의 무게는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하여.

테레자가 자신의 육체의 한계에 대해 혼란. 모든 여성의 살덩이가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게 느끼는 등. 토마시와의 관계의 아픔 때문에 악몽 속에서 손가락 아래를 바늘로 찌르거나 양쪽의 눈이 흙으로 채워지는 것 등.


강아지(카레닌)과 인간의 사랑이 훨씬 완벽하고 존엄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 카레닌의 사랑은 나를 흔들어 깨우기 충분했다.

불안한 사회의 구조화된 관념들을 주입받으며 자신의 불완전함을 채우려는 욕망. 이러한 사랑의 형태 또한 얼마나 불완전하고 애처로운가..


[인간 정신 이데올로기적 해체]

"어떤 것도 옳은 것이 없고, 어떤 것도 틀린 것이 없다.

세상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뤄진 모순이다.

우리의 삶은 모순 그 자체로 존재한다."


 



[키치에 대한 짧은 설명]

 작품속 키치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작품속에서 말하는 키치는 섞어보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고착과된 관념같은 것이라고 보는 게 좀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용어정리를 하려고 했다.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키치는 : 고착화된 관념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예술에서 말하는 키치는 전혀 없던 새로운 조합의 상상과 상상속의 속에서 생겨나는 창조물 같은 것이다. 위키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키치(Kitsch)는 미학에서 보기 괴상한 것, 저속한 것과 같은 사물을 뜻하는 미적 가치이다. 키치는 세계 각지의 전통·현대 민예품, 인형, 가면, 상, 유아 완구 등에 보인다. 예를 들면 동물과 인간의 결합이 키치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키치는 단순히 엽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대 문화에서 키치는 패션과 영화, 광고 등에 걸쳐 하나의 주요한 속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래의 작품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가 흔히 아는 키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쉽게말해 병맛(?)같은것.

[키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무비판적 사고]

인간의 두뇌활동은 매우 유연하게 작동되어 사회구조 속에서 조직적으로 획일화되어 무비판적 사고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을 억압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대중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이것이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그렇게 우리는 대중으로 자라난다.


대중은 초중고교 교육철학 시스템 속에서 반복되는 업압훈련을 통해 명령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여러 가지 관념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하며 이로써 서로 비슷하게 작동하고 서로를 비판하지 않으려 한다.

대중은 스스로가 모두 다르다고 믿지만 사실은 표류하는 정보, 언론, 교육시스템의 거짓말을 신봉한다. 그리고 세상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안정을 찾는 대중으로 자라난다.


대중은 서로가 남들과 다르다라며 굳게 믿지만 사실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열심히 일한다. 행복하지 않아도 그들은 열심히 일할 수 있다. 부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 100만 분의 1의 다른 자신을 위해 그들은 FLEX하고 YOLO 한다.


"자본주의 틀에서 부자가 되기위해 첫 단추를 꿰어야할 일은 자산을 모아가야 하는 것이다. 즉 자산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교육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노동을 통해 수입을 벌어야 한다고 교육을 통해 주입받는다. 신은 인간의 부와 가난에 대해 아무런 개입을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종교와 인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나의 교리일 뿐이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이 너무도 많다.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생각하기에 서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건강한 사회인이자 대중의 일환으로 자라날 수 있다. 더 넓은 의미로 윤리와 도덕, 법과 같은 커다란 윤리학의 철학까지 꿸 수있다.

이를 활용해 체계적으로 사회를 시스템화 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대중이 맹목적인 권력 추구자, 야심가, 범죄자에게 동질감이나 공감능력을 길러낼 필요는 없다.


권력과 힘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과 새로운 이념의 혁명가들은 싸움에서 승리하면 역사를 장식했고, 패배하면 범법자 및 범죄자가 되어 대중들의 오락거리로 버려졌다.

예를 든다면 지금은 권력자 또는 가진 자(정치가/권력가/기업가/귀족 가문 등)들의 언론을 통한 사회 매장 같은 것이 될 것이고, 과거에는 콜로세움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언론은 자본증식의 수단으로 대중의 공포를 좀먹으며 성장한다. 나는 그래서 언론과 뉴스를 비판적 입장에서 좋아한다. 그들의 거짓말을 탐구하고 비판과 재해 석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유언비어의 달인들이며 총체적 사기생 성소이다.


패배한 권력자의 길은 늘 처참했다. 부정부패가 심한 국가일수록 국가통수들이 감옥에 많이 들어간다. 권력싸움에서 패배하면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고유의 개인 영역조차도 정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발가벗겨버린다.

밀란 쿤데라는 “아무것도 비밀이 없는 개인은 괴물이다”라고 하였다. 즉,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진 자들만이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모두 발가벗겨진 권력자, 그들은 대중의 괴물이 된다. 대중들의 사회 속에 버려진 권력자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을 후회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우리는 이제 대중에서 어른으로 자라난다. 책과 역사를 통해 흐름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면서 각자의 영혼을 가진 개별체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 존재의 고상한 의미는 인본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우리 존재의 스스로의 가치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 존재의 의미는 내가 정의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싱클레어의 내면 속에 데미안이 존재하듯..




[키치 : 대중의 속임수]

“군중 속에서 개인의 존재는 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타인 또한 그만의 생각과 판단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중 속에 섞여 있으면, 혹은 커다란 조직의 일원이 되어버리면 어느 사이엔가 개인의 이해력과 판단력은 휘발된다. 그리고 그 집단을 대변하는 사고방식과 판단에 완전히 물들어버린다.

–  생성의 무죄. 니체”


신과 똥을 섞는 행위. 그게 뭐 어때서? 키치

나는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키치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키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키치함이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다만 넛지 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사회구조의 틀 속에서 잠시 자신을 오려내어 분리시키거나 꺼낼 수는 있다.


이를테면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선하고 올바르다는 믿음.
인본주의만이 진리이고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는 중요하지 않고 생명의 존엄함을 해치는 생각.
남자는 책임감이 강하고 올곧고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관념.
여성은 늘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이해와 공감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주입된 생각.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만을 보고자 하여 전통적 가치와 규범 도덕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믿음.

이러한 상투성과 감상성 또한 키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국가는 올바르다고 믿는가, 왜 사람들은 권력가의 말을 두려워하면서도 따르는가, 왜 언론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그들이 내비치는 공포심에 공감하는가. 그들의 무 비판적 사고가 나치즘을 만들었고, 유대인 학살 서명에 동의했다. 키치는 노예를 양성하고 노예는 나보다 힘이 약한 다른 노예를 암묵적으로 죽인다.

그들은 곧 말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가 동의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서명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자유로부터 그렇게 도피한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불편하지 않은 관념 또는 정념들을 넛지 해가며 다시 한번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시각과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훨씬 더 입체적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대립된 세상은 우리의 눈만으로 바라볼 수 없으며 오로지 진실된 작품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사회의 진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나는 종종 키치를 넛지 하거나 재구성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생각들의 뜻이 가장 키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관념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전체주의를 키우고 나치즘과 유대인 학살조차 합리화시켜버린다. 남들이 하니까 한다라는 말처럼 멍청한 것도 없다. 내가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것만큼 위험한 생각 또한 없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 (누가복음 23:34)”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자기확신! Es muse sein! : 이 사람이어야 한다!]

우선 나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관계는 토마시-테레자의 관계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지만 정념에 사로잡혀 욕망의 관계와 대상 속에서 가볍고 무거움을 주고받지만 서로에 대해 책임지고 애착관계를 갖는 좋은 사랑의 형태라고 보았다. 한없이 가벼운 토마시가 테레자와의 관계 속에서 한 없이 무거워 지는 것들 또한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나는 명령을 할 수 있는 남성의 무거운 태도에 대해 꽤나 긍정하는 데 토마시가 또한 그러한 캐릭터여서 보는 내내 꽤나 즐거웠다. 테레자 또한 반대편의 입장에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테레자가 사랑스러웠다.


작품을 통해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시각중 어렴풋한 것을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개인의 욕망’을 좇는 일 정도로 요약해보았다. 나는 사랑의 단계를 열정-애착(책임)-헌신의 단계로 발전해간다고 생각한다. 열정, 그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대부분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의 감정은 불완전하고 개인마다 고유하게 생각하는 어떠한 가치인 ‘그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만이 가장 잘 안다. 이 열정은 육체와 영혼(정서적)의 결합으로 첫 번째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이다.

 

 “결혼에 발을 들여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다면 차분히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자신은 상대와 여든이 되어도, 아흔이 되어도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오랜 결혼생활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며 어느 사이엔가 세월 뒤로 흘러간다. 그러나 둘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년이 될수록 대화 시간은 길어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서 중용을 강조하는데 이는 삶에대한 절제와 통제를 말한다. 결혼시스템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을 사회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로써 어느 정도 통제(절제)할 수도 있다고 보지 않았을까? 이로부터 곧 애착관계 및 헌신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에 대한 자기확신을 통해 스스로 결혼을 다짐하게 된다.


토마시와 사비나의 동물적 욕망. 그 반대편의 테레자에 대한 토마시의 자기 확신. 그것 또한 긍정해야 하는 일.

이를 테면 토마시와 사비나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관계이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만 바라봐도 불꽃이 튀는 동물적 본능과 섹슈얼함을 서로 느끼지만. 그들의 열정은 사랑으로까지 발전되지는 못하며 그럴 가능성도 그다지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매우 가볍다.


하지만 토마시와 테레자는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진 서로에 대한 열정은 확신의 형태로 발전한다.

Muse es sein? : 이 사람이어야 하는가? / Es muse sein! : 이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스스로 서로에게 서약하는 단계인 애착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이 것을 니체의 영원회귀적 자기긍정으로 해석한다.


 "만약 인생이 두 번이라면 한 번은 그녀와 살고, 한 번은 내쫓을 거야. 그리고 두 가지를 비교해보는 거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인생은 한번뿐이거든. 인생은 가벼운 거야. 계획표처럼 살아지지도 않고 인생을 고치고 개선할 수도 없어. 자기 자신대로 살아.

나는 모든 같은 것과 구별되는 100만 분의 1의 다른 것을 탐구하며 사는 거야.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지 나의 자유로운 세계가 무한하다는 증거야 - 토마시"



https://www.youtube.com/watch?v=tSvPl0PBRvo&feature=youtu.be

19:55 베토벤 바장조 op.135 4악장 (Es muse sein!)


[사랑한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사랑을 했고 무던히 헤어짐을 반복하고 공허함을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연애와 사랑..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오래전부터 결혼은 남성 및 역사의 기득권층의 권력을 다지는 동맹 수단으로써 비즈니스로 비롯된 역사로 발전되어 왔다. 왜 아직도 수많은 이들은 그 비즈니스를 사랑의 결실이라고 착각하는 걸까? 여성이라는 개인이 물건처럼 거래되는 것이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해답을 찾으려 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한하고 아가페적인 헌신이 당연한 걸까? 이는 단순히 대중이 만들어낸 무대 위의 페르소나는 아닌가?  왜 남녀 간에는 반드시 결혼이라는 시스템으로 묶어 사회제도 속에 묶어두려 하는가. 개별의 객체로써 서로 상 호합의 하에 어떠한 사랑의 형태도 용납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불과 20-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는 사회적 시선으로 실패자 인양 비추었다. 아직도 많은 어른들은 나이가 차면 결혼하고 짝을 찾아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답을 정해주려 한다.

이제는 딩크족처럼 결혼해도 아이 없이 사는 부부도 많고, LAT처럼 혼인 후에 물리적으로 독립된 공간에서 연애하던 연인처럼 지내는 부부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다자간 혼인이나 연애로 N:N의 관계처럼 지금은 다소 낯선 형태의 우정과 사랑을 공유하는 것도 비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선택이고 자기 인생에의 책임이다.

 자신이 정말 좋고 행복해하는 것에 대한 자유를 비판할 자격은 어디에 있는가. 오히려 자유를 좇는 이가 대중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자신을 잃고 표류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대로 비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어떤 사랑의 형태라도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에 이뤄지는 책임은 각자의 자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인정할 때 개별 인권과 여성인권의 자유 또한 이데올로기의 억압에서부터 보다 확장될 거라 믿는다.

  

여성 또한 아이를 잉태해야 한 사람으로서 가치가 있는 생명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스스로 독립된 인격 결정체로써 또는 경제동력으로써 제세안민과 통합의 뜻을 품고 남다른 정치철학으로 권력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자신의 가치를 둘 수도 있고, 자유시장에서 기업가로서 시장경제를 이해하고 군주의 두려움과 경외심을 일으키는 카리스마로 대중을 선도하고 이끌어 기업가 정신을 전파할 수도 있다. 대의를 위한 소의의 희생에 연연하지 않으며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거대한 부를 목적으로 하는 야망찬 탐욕가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죽음을 초월하는 두 가지 예시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첫 번째, 생명의 전이. 자신이 불안정과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안정감을 더 추구하는 보수적인 인간이라면 전통관념을 고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보편적 동물의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은 유전체 전이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DNA를 안전하게 후세에 전달하는일. 자신이 전달할 수 없다면 나와 동일한 유전체를 돌봄으로써 대리 만족하는 일도 포함된다. 

나의 DNA를 공유하는 직속 형제들, 그 것을 넘어선 자국민의 사랑, 인류 전체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 또한 곧 자신의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애, 형제애, 민족애, 인류애를 모두 학문적의미로 재해석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정신의 전이(밈-Meme). 자신이 보다 진보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정신적 전이를 통해 또 다른 방법을 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강하게 믿고 목적을 향해가는 야망찬 탐욕가, 기업가, 정치가, 대중을 휘두를 수 있는 영향의 정신적 전이(밈-Meme)을 통해 말이다. 열정과 재능을 동시에 겸비한 그들의 매력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은 대중들에게 바이러스처럼 전이된다. 다양한 예가 있겠지만, 모델T를 생산한 "헨리 포드", 애플의 "스티브 잡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종교적 광기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기업가, 예술가, 야망가, 탐욕가, 범죄자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예시는 택일을 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꿈과 이상, 결혼과 전통계습. 그 사이에서 어떤 삶의 균형을 스스로 선택할까 정리하기 좋은 예가 된다.


나는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질 용기가 있다면, 더 이상 이분법적인 관점으로써 남녀의 이데올로기는 단연코 거부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 모두는 개별 객체로써 자신의 욕망의 자유를 인정할 권리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주입된 사랑과 이상형을 나도 모르는새 대중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맹목적으로 비판 없이 좇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 자신으로 완벽히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것일 아닐까?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조금 더 개인적인 시각에서 다시 해석해보는 일들은 늘 재미있고 흥미롭다.

“곰팡이는 통풍이 되지 않는 축축한 곳에서 자라고 번식한다. 이와 같은 일이 사람들의 조직과 그룹에서도 일어난다. 비판이라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폐쇄적인 곳에는 반드시 부패와 추락이 태어나 거침없이 자란다. 비판은 깊은 의심에서 나온 심술이나 고약한 의견 따위가 아니다. 비판은 바람이다. 이마를 시원하게 식히기도, 눅눅한 곳을 건조시키기도 하여 나쁜 균의 번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비판은 쉼 없이 들을수록 좋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과 에로티즘에 대한 생각]

토마시와 사비나의 애로티즘. 사비나는 자신에게 명령해줄 수 있는 강한 남성을 원하는 것. 복종과 수치심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 그 모습을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데에서 느끼는 토마시의 흥분과 같은 것. 그 것은 사회의 구조화 속에서 생겨나는 관념의 양방향의 극적 합일이다. 서로의 눈빛을 통해 느껴지는 강렬한 마찰, 섹슈얼함은 그 곳에 있다.


에로티즘은 서로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양끝 관념의 합일로써 가장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에로티즘의 본래 모습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성욕에만 몸을 맡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본래 진정한 운명이어야 할 사랑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성욕만이 두 사람의 굴레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조금씩 성장해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욕을 먼저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의 발달에 한걸음 뒤로 성욕이 동반되는 정도가 적당하다. 그럼으로써 상대로 자신도 깊은 사랑을 육체와 함께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육체 모두가 동시에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 선악을 넘어서. 니체”


 


 

사랑의 진리는 무거움도 가벼움도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이며, 삶이라는 것은 모순 그 자체로 존재한다.
사랑은 언제나 모순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 모순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자신을 마주할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사랑은 자기 내면의 미지의 것을 탐험해 가는 모든 일이다.

“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대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의 다리를 건네는 것이 사랑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 니체”  

니체는 진리가 곧 여성에서부터 비롯되며 여성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가볍고 즐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개인의 삶은 덧없이 가벼운 것이며, 그렇기에 인생이 내일 죽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후회 없이 즐거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의 관념, 그리고 전통,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유에 대해서부터 벗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방법은 사랑. 나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이 것이 현대철학의 성장 시조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서로 뒤섞여 소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려 노력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미학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빛이 부서지는 강물에 가슴설레일 수 있고

사랑함으로써 내면의 깊이를 더하고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아름다운 인향을 더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이자 미학이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한 성장이 우리의 진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빈센트 반 고흐 - 론강 별이 빛나는 밤

우리는 왜 음악을 사랑하고, 밤하늘의 달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음악과 달빛 모두 우리의 밤을 아름답게 비춰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마음에 찾아오는 수많은 어둠의 밤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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