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워킹맘에게
2001년 2월 13일.
나이가 들며 기억력이 떨어져도 입사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나에겐 처음 디뎌본 구미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렇게 시작한 회사 생활은 이제 19년을 지나고 있다. 회사를 이만큼 다니다 보니 '오래' 다닌다는 것에 떳떳하지 못하는 시기가 찾아 온다. '어쩜~ 이렇게 오래 다니셨어요?' '대단하시네요~' '비결이 뭐예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피하게 되면 그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스럽다. '일에 치여 하루 하루 살다보니 이만큼 된 것인데 나한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삐딱선도 타게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회사에 널려 있었고 회사 사람들이 나쁘지 않았고 별다른 재주 없는 공순이라 이거 아니면 딱히 할 것도 없을 뿐이었다. 깊이 생각할 겨를없이 나의 시간은 흘러갔다.
비슷한 질문을 계속 받다 보니 안되겠다 싶어 마음을 잡고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19년을 존버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이 돌고 돌아 엄마한테 다다른다.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다. 다행인 건 오늘이 가장 가난했다는 것이다. 잘 살다가 사업이 쫄딱 망해 단칸방으로 들어가면 하루 하루가 지옥이겠지만, 매일이 가난했던 사람은 조금씩 늘어가는 살림에도 행복하다. 단칸방 월세에서 두칸 반지하방으로 수차례의 이사를 거쳐 4층 빌라 우리집으로 이사를 가던 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뭐가 문제였는지 항상 집에만 있는 엄하기만 한 아빠 대신 일하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딸 셋을 낳은 죄밖에 없는 엄마는 먹고는 살아야 하니 젖먹이 아이들을 남겨두고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잠자고 있던 젖먹이 나를 두 살 터울 언니한테 맡기고 나오며 엄마는 내 몸에 천을 감아 문고리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보니 울면서 마당까지 기어 나와 있던 나를 발견한 엄마. 그 쓰라린 마음을 내가 자식을 낳고 보니 조금 알게 되었다.
엄마의 다음 직업은 야채 장사였다. 슬래브 지붕이 있는 재래시장으로 업그레이드 하여 온갖 야채를 팔았다. 초등학교 고사리 손으로 무수히 많은 콩을 까고 또까고, 도라지 손질, 고구마 줄기 벗기기 프로가 되었다. 설날과 추석날이 되면 산더미 같은 도라지와 고사리를 손질하던 그때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엄마가 있는 시장을 지나야 했는데, 멀리서 엄마가 보일라치면 몸을 숨기곤 했다. 혹여나 친구들한테 들킬까봐 엄마의 가게를 피해 다녔다.
15년간의 야채장사를 청산하고 엄마는 마련한 밑천으로 큰 모험을 하셨다. 양재동에 작은 가게를 얻어 외할머니와 함께 추어탕 식당을 개업하신 것이다. 대학생이 된 나는 주말과 방학 때 추어탕을 나르며 서빙의 달인이 되었다. 엄마의 넉넉한 인심으로 장사는 잘되었고 처음으로 우리 집이 생기고 우리 차가 생겼다. 행복이 이어지던 어느 날, 뺑소니 사고로 외할머니를 잃었고 일주일간 아침마다 통곡하는 엄마의 소리에 잠을 깼다. 그 후로도 엄마는 통닭집, 반찬가게, 파출부 등 계속 일을 하셨고 엄마의 직업을 따라 나의 커리어와 경험도 하나씩 쌓여 갔다. 지금은 출근하는 동생을 위해 조카들을 봐주시고 계신데, 작년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셨다.
이제 우리 가족은 지난 일을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여유를 찾았다. 항상 쪼들리게 살아온 것에 비하면 나는 지금 백만장자다. 지금도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엄마. 이제는 좀 쉬라고 잔소리해도 잘 안 듣는 우리 엄마가 진짜 워킹맘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회사 스트레스로 애꿎은 아이한테 신경질 내고 화내고, 그러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한테는 생전 화 한번 안 낸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는 그렇게 평생 힘들게 일했는데, 나한테 신경질 내거나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내가 밉거나 나한테 화가 난 적이 없었어?"
"내가 일하느라 너희들한테 평생 해준 게 없는데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니?"
신은 공평하다. 신은 나에게 엄마를 세게 주셨고 아빠를 너무 약하게 주셨다.
무슨 이야기든 기승전 돈 한 푼 안 벌어다 준 아빠 이야기로 끝나는 엄마와의 수다도 이제는 재미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엄마는 그만큼 마음도 크고 넓다. 사내처럼 시원시원 호탕하다. 이런 엄마의 성격은 주변 사람들이 엄마를 믿고 따르게 만들었다. 주말마다 모임에 나가기에 바쁜 엄마. 언젠가 엄마 친구분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아이고, 정자는 똥 빼고는 버릴 것이 없네~
엄마는 칠십이 다돼서야 행복해지셨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라 한다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신다. 나는 엄마보다 조금은 빨리 행복한 워킹맘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출근을 한다.
워킹맘에 대한 에세이로 출판사 투고를 하고 내가 들은 답변은 심플했다.
"워킹맘에 대한 책은 워킹맘도 잘 읽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 70평생의 일과 삶 그리고 나의 20년간의 일과 삶은 심플하지 않다. 나의 글을 읽고 힘을 낼 단 한명을 위해 노트북 폴더에서 잠자고 있던 나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