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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Jul 24. 2019

전쟁과 평화

치약과 게임기 사이에 어딘가 

“치약 밑에서부터 짜는 게 그리 힘드냐?, 좋게 말해선 말귀를 못 알아먹지?”

그동안의 다툼은 이번 사건에 비하면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약속 시간 지각, 저녁 메뉴 선정, 사소한 질투는 어쩌면 이번 전쟁의 서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에 충돌을 피해왔지만 우리 둘의 앙금은 깊은 곳에서 쌓여있었나 보다. 전운이 드리우기까지 충분한 예열이 있었지만 나와 그녀는 외면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관계의 어디쯤에서 군데군데 파열음이 들리고 있었다. 결국 그간의 응어리는 우리 사이의 봉합하지 못한 상처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분노의 방아쇠는 치약의 ‘치약 짜는 법’에서 당겨졌다. 어제부터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냥’ 안타까워만 했다. 약간의 짜증은 고통에 의한 약간의 애로사항이라고만 넘겨짚었다. 하지만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 그녀의 분노는 임계점을 지나쳐 있었다. 결국 치약에서부터 구른 분노의 눈덩이는 내 게임기가 욕조에서 잠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인간은 변곡점을 지날 때는 눈치 채지 못한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봐야 ‘내가 변곡점을 지나고 있구나’ 알아챈다고 한다. 아, 지금 나는 인생의 곡선에 멀미가 날 것 같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내려야 할 것 같다. 


“야 치약 하나 때문에 게임기를 물에다 담그냐?, 미쳤어?, 나도 못 참아. 됐어 헤어져 그만해!” 

선전 포고 비슷한 내 발언을 듣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출근한 뒤에 집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강 대 강.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에서 생활했다. 야식, 게임, 친구들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일탈을 마음껏 누렸다. 주위의 결혼한 친구들은 내게 부러운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렇게 자유로운 생활에 점점 익숙해질 때쯤, 문득문득 걱정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아내의 손길에서 그녀의 공백이 느껴졌다. 큰소리치며 말은 해놨지만 그녀와 영영 헤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여기서 꿇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물에 잠긴 게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명분 없는 종전은 항복이랑 다를 게 없다. 그렇게 치약의 뒷부분을 짜는 게 습관이 될 때쯤, 장모님과 장인어른이라는 평화유지군이 개입했다. 


“이 서방, 빨리 와서 지랄 맞은 내 딸년 빨리 데려가. 나도 같이 못 살겄어” 

평화유지군의 활약으로 우리 사이의 평화는 급물살을 탔다. 아내가 다시 들어오기 전, 마지막 회담에서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많이 힘들었다는 그녀를 보며 나도 함께 울었다. 뭐가 그리 서글펐는지, 우리는 한 낯의 공원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함께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내 삶은 다시 안정됐다. 아내의 독립선언 이후 약 일주일 만에 우리 집에는 비로소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출근과 퇴근할 때, 예전처럼 나를 깨워줄 누군가가 옆에 있고, TV를 보면서 더 이상 혼자 떠들지 않아도 된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이번 달은 아껴야 한다고 말했잖아, 왜 그렇게 멋대로 판단해?" 

봄은 짧다. 길어야 한 달이다.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도 즐길 만하면 어느 새인가 가고 없다. 흩날리는 벚꽃도 며칠을 못 간다. 황사와 미세먼지는 짜증을 부른다.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나의 다정한 모습도 찰나였다. 서로를 향한 잦은 화는 덤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무르익는 화해무드에 물에 잠긴 게임기가 생각나 충동적으로 새로운 기계를 사 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아내는 게임기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경기를 일으켰다. 아내의 볼멘소리가 다시 집안을 가득 메웠다. ‘아내가 집에 온 것이 평화인가?, 나 혼자 조용히 살고 있는 게 평화가 아니었을까?’, ‘지금이 다시 전쟁 같은 거 아닐까’ 나는 때 아닌 근본적인 의문에 빠져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오늘 회사에 바쁜 일이 있어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다. 북적이는 지하철에 몸을 싣자, 그때 무언가 뇌리를 번쩍 스쳐갔다. 


“아, 치약 중간부터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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