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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장병장 Aug 19. 2019

한국형 히어로, 김보통씨

10분 만에, 10분 안에

시계를 하나 주웠다. 라면을 사러 나갔다가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발에 차이는 게 있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목시계가 하나 보였다. 은빛 메탈을 품은 흔히 볼 수 있는 시계였다. 딱히 급한 일도 없고 발로 살짝 건드려봤을 때 묵직한 게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어둑한 골목,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가로등도 꺼져있어 내 양심을 쉽게 숨길 수 있었다. 갑자기 라면 생각이 싹 가시 었다. 두근대는 마음에 가는 길을 멈추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시계는 12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재 시각 하고는 거리가 있어 우선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손목시계는 군대에서만 차 봤지 전역하고 나서는 제대로 만져 본 적도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봤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시키는 대로 힌지를 당기고 지금 시간에 맞춰 이리저리 돌리고 난 후 힌지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이 함께 한 바퀴를 돌고 난 후 다시 12시 멈췄다. 몇 번을 반복해도 시계는 도로 12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째깍. 초침과 분침이 움직이기는 했지만 12시 10분에서 시계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멈춰있는 시계를 보면서 이건 가짜 롤렉스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몇 시간 전 가짜 롤렉스를 보며 너무 놀라며 그걸 몰래 주머니에 챙겨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시계를 눈앞에서 치우기 위해 서랍 속 깊은 곳에다 숨겨버렸다.


“띵띵띵띵!” 알람이 시끄럽게 나를 깨웠다. 오랜만의 알람을 맞춰놓아서 그런지 더 크게 귀를 쏘아붙이는 것 같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동기들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취직도 못하고 빌빌 거리는 모습을 쉽게 보여주기 힘들었다. 전화 오는 것도 몇 번 피하다 보니까 숨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친하게 지냈던 동기 하나가 집 근처까지 찾아와 만나는 바람에 결국 도피 생활은 들키고 말았다. 쫙 빼입은 동기 놈에 비해 나는 후줄근한 추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우리 둘의 옷차림이 현재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동기가 자리를 일어나면서 난감했던 시간이 다 지나갔다 싶던 참에 청첩장을 주며 결혼 소식을 말했다. 입으로는 축하하면서 속으로는 축의금 생각을 하는 내가 정말 미웠다.


졸업할 때 산 정장을 입고 머리도 만져봤다. 오늘 하루만큼은 골방 퉁수에서 벗어나 세상에 이바지하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스스로 OK사인을 내고 가려는데 뭔가 하나 허전했다. 가짜면 어떠랴. 나는 부리나케 서랍 속 롤렉스를 꺼내 손목에 찼다. 왼손이 묵직한 게 이 순간만큼은 진짜 롤렉스 부럽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시계의 시간을 맞춰봤다.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힌지를 당겼다가 돌리고 다시 밀어 넣어봤지만 시계는 변함이 없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쉽지만 과시용 롤렉스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롤렉스는 12시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롤렉스 12:00]

오래간만에 아침 일찍 일어난 탓인가 눈이 자꾸 감겼다. 행여 정거장을 놓칠까 정신을 차려보려 했지만 떨어지는 눈꺼풀은 너무 무거웠다. 결국 잠에 못 이겨 잠시 눈을 붙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순간 차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 지금까지 버스를 타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옆으로 자빠져버린 버스 때문에 승객들은 바닥을 향한 창문에 쏟아져있었다. 신기한 건 내가 그 찰나의 순간에 손을 뻗어 좌석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롤렉스 12:01]

‘턱걸이도 하나 못하는 나인데 좌석을 잡고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건지’, ‘사고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빠르게 움직인 건지’ 의문투성이였지만 우선 반대쪽 창문으로 쏠려서 다친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몇몇은 의식을 잃었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내려가 사람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버스기사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고 나는 운전석의 아무거나 눌러보고 댕겨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창문을 깨라고 비치해둔 망치는 온데간데없이 찾을 수가 없었다. 창문에 집어던질 것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버스 앞으로 걸어가 양 손으로 유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유리가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롤렉스 12:05]

이해할 수 없지만 초인적인 힘이 생긴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반사 신경과 운동 신경 그리고 버스 앞 유리를 가볍게 두 주먹으로 깨버리는 근력까지 영화 속 슈퍼히어로가 이 세계에서는 바로 나였었다. 무언가를 내가 할 수 있고,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미소가 실실 새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승객들을 모두 구하지 못했다.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다. 나는 의식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환자 두세 명씩을 한쪽 어깨에 올리고 구조했다. 탈출한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고맙다고 할 때는 오랜만에 삶의 이유를 찾은 기분이었다.


[롤렉스 12:07]

버스 기사님을 마지막으로 버스 안 승객들을 모두 구출하고 나니 난장판이 돼버린 성수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 때문에 다른 차들이 연쇄 추돌해 사고가 나있었다. 몇몇 경차들은 가벼운 탓에 버스처럼 옆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가까운 차량부터 다가가 사람들을 구했다. 차체가 찌그러져 버스보다 사람을 구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안전벨트를 맨손으로 찢고, 문짝을 뜯어내고, 구겨진 운전석을 헤치면서 사람들을 차 밖으로 구출해냈다. ‘이게 될까?’하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가능했다. 경미한 부상을 당했거나 의식이 돌아온 사람들 몇몇은 나의 초인적인 활약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이따금씩 나오는 감탄사에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롤렉스 12:09]

버스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구조했다. 이제 남은 곳은 옆으로 거꾸러진 경차 하나였다. 차 보닛에 불이 붙어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사람을 구해내면 된다. 간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가득 찬 눈빛과 수많은 카메라들을 앞에서 불이 난다고 겁나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모처럼 들은 사람들의 칭찬은 나에게 용기를 줬다. 나는 한걸음에 경차로 달려갔다. 의식을 잃은 운전자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부상이 심해 보였다. 우선 말을 듣지 않는 문을 뜯어 저 멀리 날려버렸다.


[롤렉스 12:10]

운전자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벨트 잠금장치를 눌러봤지만 역시나 벨트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안전벨트를 끊기 위해 벨트를 쥐고 가볍게 힘을 줬다. 하지만 벨트는 꼼짝하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했다. 몇 번이나 다시 힘을 줬지만 벨트는 그대로였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있었던 초인적인 힘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다고 구조를 포기하고 나갈 수는 없었다. 밖에는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또 비로소 내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됐다. 연기가 점점 더 심하게 피어오르고 타는 냄새가 진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


[롤렉스 12:11]

쾅! 소리와 함께 뜨거움을 못 견딘 자동차가 폭발해버렸다. 이름 모를 의인은 끝까지 자동차 운전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영화 속 히어로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구조할 때는 언제고, 청년은 경차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청년의 왼쪽 손목에는 12시 10분에서 멈춰있는 롤렉스 시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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