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소나무, AD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와인 양조 역사
부르고뉴 와인은 단일 품종으로 만들어집니다. 먼저 Pinot noir로 만드는 레드는 pinot (어원: 소나무) noir (검은색) 소나무의 솔방울처럼 포도 열매가 작고 송골송골 맺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실제로 피노누아가 심어져 있는 밭을 보시면 작은 포도알이 여러 개 빽빽하게 맺힌 걸 볼 수 있습니다. 피노누아라는 품종은 건조해서도 안되고(일조량이 너무 많아도 안 됨) 습해서도 안되며 적당히 서늘한 환경에서 꼼꼼하게 케어해주어야 잘 자라는 까다로운 품종입니다. 또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습기가 차서 특유의 얇은 껍질에 곰팡이가 생겨 품질에 좋지 않아요.
그런데 와인 지질학 배우며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대륙의 더운 공기와 만나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짙은 안개는 석회질 토양과 조화를 이뤄 피노누아를 키우기에 좋다고 합니다. 안개도 습기를 만들 텐데 말이에요. 실제로 부르고뉴 투어를 가보면 안개가 자주 끼어 있습니다. 도멘 드루앵(Domaine Drouhin)의 로버트 드루앵(Robert Drouhin)은 미국 오리건 주의 환경이 피노누아를 재배하기 좋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1987년 오리건의 던디 힐에 60헥타르를 사들입니다. 그리고 딸 베로니끄를 와인 메이커로 임명한 후 부르고뉴 디종 지역의 와인 묘목 클론을 그대로 가져와 심습니다. 1991년, 도멘 드루앵 오리건 피노누아 1988년 빈티지를 세간에 선보이며 와인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는 동시에 본인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음을 증명했죠. 이후로 오리건 지역은 피노누아의 제2의 고향이자, 신세계 와인 중 피노누아를 가장 잘 표현하는 테루아르로도 불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부르고뉴에 가보시면 포도밭들이 작게 쪼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프랑스혁명 시 귀족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재분배할 때 크기를 잘게 쪼갰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장자에게만 상속시키던 관습을 깨고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르고뉴의 와인 제조 역사는 무려 AD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로 와인 평을 받은 해도 591년대라고 하니 매우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보르도와 더불어 2대 와인 생산지로 꼽히는 곳이고요. 로마네 콩티는 다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와인이자, 실제로 1위에 계속 랭크되는 와인이죠. 겨우 1.8 헥타르에서 연간 5천 병 정도만을 생산하고, 심지어 선주문을 받는 것으로도 마감되는 해도 있으며, 특정 빈티지는 병 당 천만 원 이상을 훌쩍 넘습니다. '로마네'는 당시 부르고뉴에 주둔했던 로마군의 이름에서, 콩티는 루이 15세의 친척이었던 콩티 공이 본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지요. 수도원으로부터 좋은 값을 쳐 주고 사들여 본인의 이름을 붙인 뒤 프랑스혁명 전까지만 해도 상용이 아니라 콩티 공 본인이 마실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었습니다.
피노누아로 만든 레드에서는 딸기, 체리, 산딸기 등 붉은 베리류 과실에서 나오는 향과, 달달한 향신료 및 오크통에서 나오는 섬세한 오크 아로마가 특징입니다. 여기에 숙성이 더해지면 버섯, 트러플 버섯, 제비꽃이나 가죽에서 나는 특유의 향 등 동물성 및 식물성 아로마가 느껴집니다. 피노누아는 소스가 강한 것보다는 재료 자체의 맛을 살려 담백하게 요리한 것과 훌륭한 마리아주를 선보입니다. 부르고뉴 특산품인 닭고기와도 잘 어울리겠고, 훈제하지 않은 연어나 참치와도 잘 어울립니다. 각종 버섯요리와 칠면조 구이와도 궁합이 좋고요. 화이트 와인의 경우 샤도네이가 대표적인데, 다른 지역에서는 화이트 와인 품종의 경우 오크 숙성을 하지 않는 생산지도 많지만 부르고뉴에서는 오크 숙성 화이트를 비교적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감귤, 복숭아, 시트러스 향이 주를 이루고 좀 숙성된 경우 버섯향이 납니다.
와인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단일품종이 원칙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와인 코너에서 블렌딩한 부르고뉴 화이트가 보여 놀랐어요. 딱히 출처를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그게 그냥 특이한 경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알리고떼라는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도 좋아하는데요. 상큼하고 향이 신선해서 해산물과 잘 어울리고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품종이지만, 더 많이 알려질 가치가 충분합니다. 홍합 요리에 사용하기에도 좋고, 키르와 섞어서 식전주로 마시기에도 훌륭한 와인 품종이에요. 부르고뉴 와인을 좀 드셔 보셨다면 등급이 궁금하실 텐데, 이미지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The Wine Demystifier라는 데서 퍼왔어요.
제일 아래부터, 라벨에 그냥 Bourgogne이라고 쓰여 있으면 지방 등급입니다. 마을이나 밭의 출처를 표기하지 않고 그냥 AOC 지정 범위 내의 포도로 만드는 와인이고요, 그 위가 마을 등급입니다. 프르미에 크뤼는 1등급 밭의 포도만 사용할 수 있고, 상위 등급인 그랑 크뤼의 포도를 섞을 수는 있지만 마을 등급의 포도는 안됩니다. 지방 등급 - 마을 등급- 프르미에 크뤼 - 그랑 크뤼 순으로 상위 등급의 포도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하위 등급의 포도와는 섞을 수 없습니다. 그랑 크뤼는 특급 포도밭으로 취급되며 총 33개가 있는데, 로마네 콩티도 이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산자에 따라서는 밭을 여러 개 갖고 있을 경우, 프르미에 크뤼 포도로 만들었어도 본인 기준에는 그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일부러 강등시켜서 내놓기도 합니다. 그런 후 몇 해 지나 다시 본인 마음에 드는 성숙함이 보이면 제 등급으로 내놓기도 하고요. 이 밭 등급은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보르도 지역과의 가장 큰 차이점도 등급 체계이지요. 보르도 지역에서는 와인을 만드는 곳, (샤토 등)이 중요하다고 본다면 부르고뉴는 포도밭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포도밭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한 생산지에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포도밭 표기를 반드시 합니다. 하지만 등급이 나뉘어 있다고 해서 하위 지방 급이나 마을 급 와인은 품질이 반드시 낮다! 는 것은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랑 크뤼를 시도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생각하는 예산 내에서 여러 번 마셔보고 판단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지방 급이나 마을 등급에서도 충분히 맛있는 와인이 많아요. 생산량 대비 레드 및 화이트 등급 피라미드 이미지를 참고해보세요. 출처는 Beaune 관광안내 사이트입니다.
부르고뉴 추천 와인입니다. 아뻴라시옹 샤블리의 Jean-Marc Brocard 2014 Domaine Sainte Claire Chablis Bourgogne blanc으로, 샤도네이 단일 품종을 사용해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한 화이트 와인입니다. 생굴하고 궁합이 좋아요. 가격은 프랑스 기준 12유로 대.
Domaine Jean Manciat - Mâcon-charnay Vieilles Vignes 연령대가 높은 포도로 만든 와인입니다. 가격대는 12-13유로. 와인을 드셔 보시면 이미 꽤 성숙해 있는 느낌이라, 오래 킵할 와인은 아니고 구입 후 3년 이내에 드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레드 와인으로는 Givry 1er cru 2012 - Clos du Cellier aux Moines을 추천합니다. 1130년에 수도사들이 설립한 도멘인데 2004년에 민간에 팔렸어요. 옛날 방식 그대로 와인을 제조하며, 피니시가 긴 것이 특징입니다. 30유로 대에 구입할 수 있는 동급 와인 대비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가장 무난하리라고 보는 Mercurey 2013 - Château de Chamirey. 부르고뉴 레드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모든 요소들, 부드러움, 적당히 달달한 향신료, 자극적이지 않은 후추 향, 과일향, 숙성 시 나타나는 동물성 아로마 (가죽 등), 탄닌이 강한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실망하실 수도 있겠네요. 22-23유로대.
레퍼런스:
https://www.beaune-tourisme.fr/
https://thewinedemystifier.com/
보르도 와인과 비교해보시려면?
https://brunch.co.kr/@andreakimgu1k/6
https://brunch.co.kr/@andreakimgu1k/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