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에 나누어 풀어드려요
보르도 지역의 와인 생산은 1세기 중반에 로마인들에게서 배운 방식 그대로 시작됩니다. 당시만 해도 지역 내 소비를 목적으로 와인을 만들던 것이었는데, 12세기에 이르러 아끼뗀(Aquitaine)의 알리에노르(Aliénor) 공주와 앙리 쁠랑따즈네(Henri Plantagenêt, 후에 영국의 왕이 됨)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규모가 커집니다. 이후 보르도 지역이 앙제방 제국(Empire angevin)의 아끼뗀 주에 편입되면서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영국으로의 수출길을 열게 됩니다.
보르도 지역의 네고시앙들은 영국 왕으로부터 세금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보르도를 떠나는 배들은 대량의 와인을 싣고 출발했다가 직물, 식료품, 귀금속 등을 다시 채워 돌아왔다고 해요. 당시 보르도에서 생산되던 와인은 끌라렛으로, 영국인들의 취향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보르도 와인 수출은 호황을 이루며 계속되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하며 중단되어요. 이후 1453년에 보르도가 프랑스로 다시 귀속되면서, 와인 생산 및 품질 관리는 프랑스 정부가 통제하게 됩니다. 루이 11세 이후 보르도 항에 영국 배가 드나드는 걸 다시 허락한 후, 와인 수출이 재개되지만 예전 같은 영광을 찾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보르도 와인 메이커들은 상업에 뛰어났던 네덜란드 인들과 드라이한 화이트, 당도가 높은 화이트 및 다른 레드와인의 생산을 도모하게 됩니다. 메독에서의 와인 생산 가능성을 알아본 것도 네덜란드인이고요. 오크통을 유황으로 소독하여 와인의 운반과 배송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지금은 메독하면 카베르네 소비뇽을 떠올리지만, 이는 19세기 이후에 품종을 바꾼 것이며 당시에는 메독에서 말벡이라는 품종을 심었었어요. 18세기에 이르며 보르도 와인은 다른 국가로도 수출을 늘려가는데, 처음에 진출했던 시장인 영국에서 여전히 보르도 특유의 떼루아르가 느껴지는 와인의 품질을 높이 쳐 준 덕분에 '보르도는 고급 와인이다'라는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크뤼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정립하고, 와인을 병에 담아 코르크로 막아서 수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입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19세기에는 네고시앙 및 샤토를 소유한 생산자들이 자유 무역을 시작하며 큰 번영을 누립니다. 1855년에는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만국박람회를 열어 프랑스 특산품을 세계 각국에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이때 보르도 와인 역시 출품하여 등급을 나누게 되어요. 프랑스인들끼리는 라벨만 보면 어느 지역이고 품질이 고급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지만 프랑스 외의 사람들에게는 이를 식별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메독 지역 내에서만 6000개가 넘는 샤토 중에서도 상위권을 고르고 이 중 등급을 정해 1-5등급까지 나누어 선보인 것입니다.
원래 등급 산정 기준은 메독 지역이어야만 했는데, 샤또 오 브리옹은 여기에 예외적으로 포함됩니다. 보르도 지역에 샤토 개념을 도입하여 포도의 재배, 발효, 병입 등을 모두 한 자리에서 하게끔 정한 사람이 장 드 퐁탁이라는 사람인데, 이 가문이 설립한 와이너리가 바로 샤토 오 브리옹입니다. 그래서 메독이 아닌데도 참가할 수 있었겠죠? 이 만국박람회에서 1등급으로 등록된 와이너리는 총 다섯 개.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Ch. Lafite-Rothschild), 샤토 마르고(Ch. Margaux), 샤토 오브리옹(Ch. Haut-Brion), 샤토 무통 로트칠드(Ch. Mouton-Rothschild)로, 아마 다들 이름은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 중 샤토 무통 로칠드는 원래 2등급이었다가, 1973년에 1등급으로 승격됩니다. 1973년에는 피카소가 라벨을 디자인했던 해인데 이때 1등급으로 승격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피카소가 이 해에 사망하는 바람에, 1등급 승격 기념 동시에 피카소 라벨이라는 것까지 프리미엄이 붙어 1973년 빈티지 가격이 상승하죠.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 중 좋은 빈티지로 보는 해는 1990년, 1998년, 2000년, 2003년, 2005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5년입니다. 특히 2015년 빈티지는 보르도 지역뿐 아니라 프랑스 전반적으로 품질이 좋은 해였다고 볼 수 있죠.
보르도 레드는 블랙 커런트, 플럼, 미네랄 아로마, 삼나무 및 제비꽃 아로마가 느껴지며, 미디엄/ 풀바디에다 입 안을 바짝 마르게 하는 강한 탄닌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탄닌 덕분에 와인을 오랫동안 숙성시킬 수 있죠. 보르도는 특히 빈티지에 따라서 품질과 맛이 많이 달라지는 와인이기도 합니다.
보르도 레드 블렌딩은 주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베이스로, 메를로(Merlot),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쁘디 베르도(Petit Verdot) 및 말벡(Malbec) 등으로 블렌딩하며, 까므네르(Carménère)라는 스페인 품종을 섞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식과의 마리아쥬를 알아볼까요? 두툼한 스테이크와의 궁합이 가장 기본일 것이고, 탄닌이 강해 약간 기름진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곁들여 먹으면 와인 맛과 고기가 동시에 부드러워지는 듯한 효과가 있죠. 블랙 페퍼 스테이크, 필레 미뇽, 바스크 지방 치즈, 꽁떼, 화이트 체다 치즈나 그릴로 구운 야채를 추천. 겨자나 고수 등의 양념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에요. 서빙 온도는 17도 정도, 흔히들 room temperture라고 하는 18도 정도에 맞춰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디캔팅을 미리 해주면 더 좋고, 디캔팅이 힘들다면 마시기 30분 전에 따 두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약 90%는 레드이지만, 화이트도 꽤나 훌륭합니다. 화이트의 경우에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세미용(Sémillon), 무스까델(Muscadelle) 등을 사용하며 자몽, 레몬이나 라임, 구스베리, 레몬 껍질, 카모마일 등의 아로마가 특징입니다. 이중 드라이 화이트 와인의 경우에는 소비뇽 블랑을, 스위트 화이트 와인은 세미용과 소비뇽에 무스까델을 블렌딩하여 생산합니다. 그 외에도 꼴롱바르(Colombard), 메를로 블랑(Merlot Blanc) 및 위니 블랑(Ugni Blanc) 등을 사용합니다. 포도알을 따서 맛보면 무스까델이 확실히 더 당도가 높지만, 세미용으로도 당도 높은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귀부 현상(Botrytis cinerea이라는 회색 곰팡이가 포도 껍질에 생기면 껍질이 바짝 마르는데, 이때 구멍을 내서 수분을 증발시켜 버리고 내부에서 과즙을 더욱 농축되게 하는 것) 덕분에 수확을 한 후 세미용으로 만들면 당도가 엄청 높은 스위트 와인이 되는 것이죠. (ex: 소테른) 색상도 한층 더 황금색을 띠며, 와인을 만들면 오일리한 느낌이 납니다. 이 외에도 루아르의 슈냉 블랑 및 독일의 리슬링 품종 역시 귀부 현상을 이용해 당도가 높은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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