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불문으로 살아남는 법
Prologue- 나의 프랑스어 연대기
"불어는 나중에 취업하기 힘들지 않나? 불어보다는 영어를 해야지"
"우와, 프랑스어라니 멋져요!"
내가 프랑스어를 시작했던 고등학교 때부터 프랑스어를 한다고 하면 주로 주변 반응은 이렇게 두 가지로 갈렸던 것 같다. 전자의 경우는 주로 그 당시 기준의 어른, 혹은 성인으로 '밥벌이'로서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에 대한 우려어린 시선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또래나 비 언어 전공자의 불란서어에 대한 로망으로 인한 찬사 비슷한 거였던 것 같은데 놀랍게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2가지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흡사 '영어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제2 외국어, 그것도 비 인기 언어 중 하나인 프랑스어를 접하는 사람도 적을뿐더러 중국어나 일본어처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닌 탓도 있으리라.
그리고 뒤 이어지는 질문은
"그럼, 프랑스에 살다 오셨어요?" 혹은 "어떻게 프랑스어를 배울 생각을 하셨어요?" 정도가 되시겠다.
이말의 속 뜻은, '이 희귀한 프랑스어를 이렇게 할 정도면 프랑스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겠구나' 하는 어림짐작과 '아무 연고도 없는 언어를 대관절 왜 그리고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버무려진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쨋든 흔치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나의 프랑스어 연대기 I - 영어로 쏘아 올린 프랑스어
내가 처음 프랑스어를 시작했던 건 세기말 이후 21세기의 포문을 열리고도 1년 정도 지난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다, 나의 프랑스어 역사를 말하려면 그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매주 1번, 눈높이 수학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해답지를 베껴내기 바쁘고, 문제집을 장롱 속으로 밀어 넣고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던 깜찍한 초등학생이, 눈높이 영어 선생님 오시는 날은 목을 빼고 기다렸다. 문제지도 이미 몇 번은 더 들여다보고 테이프는 반복해서 들어서 다 외워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숫자에는 잼병이었지만 꼬부랑글씨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영어 발음에 매혹되어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최애 과목은 단연 영어였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 보니, 고등학교 중에 무려 '외국어' 고등학교라는 곳이 있다는 것.'외국어'라는 세 글자에 이끌려 그 길로 나의 목표는 외고 진학이 되었다. 후에 이렇게 나처럼 순전히'외국어'가 좋아 온 친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어쨌든 나와 프랑스어의 만남은 이렇게 싱겁게 시작되었다.
당시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영어시험과 창의력 문제 비슷한 시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점수에 따라 6 지망까지 지망 순으로 과가 배정되었다. 영어와 중국어가 가장 경쟁률이 셌고, 나머지 학과들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워낙 흐려진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다. 그렇게 1 지망 영어, 2 지망 중국어를 지나 3 지망 프랑스어과로 합격증을 확인 한 날, 중학생 김 오뚝이는 엄마를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그때의 벅참은 생생히 남아있다.
영어만도 좋은데 프랑스어도 배울 수 있다니. 외국어를 이렇게나 마음껏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시작한 학창 시절은 사실 녹록지 만은 않았다. 나름 그 당시 학교 대표로 영어 말하기 대회 교육청 대회까지 나갔던 김 오뚝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살다오지 않은' 평범한 학생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외국어 고등학교라 어쩌면 당연할 순 있지만 어쩜 외국에서 살다온 애들이 그렇게 많은지. 분명 과는 불어과인데 영미권에서 살다온 친구, 독일에서 살다온 친구 (얘는 거의 4개 국어를 한 것 같다), 프랑스에서 살다온 친구 기타 등등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아, 나보다 영어(프랑스어도) 잘하는 애들이 정말 진짜 많구나'라는 생각이 17세 김오뚝의 가슴팍에 꽂혔다.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 없던 김오뚝은 그렇게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우물 밖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프랑스어 연대기 II -TOP 3가 되다니
그렇게 고등학교 때 무려 '전공'어라는 2번째 외국어를 갖게 된 나는 그때까지 해도 몰랐다. 내가 프랑스어로 밥을 벌어먹고 살게 될 줄이야. 당시만 해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이 재밌었고, 또 프랑스어라고 하면 한밤의 TV 연예 방송 오프닝과 클로징에 들렸던 샹송과 방송인 이다도시가 전부였던 나에게 프랑스어는 신기한 도전이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혀 근육과 입술 근육을 찾아내 꼬고 비틀고 콧소리를 내는 발음이 처음엔 어찌나 남사스럽고 어색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어느정도 생경한 발음에 익숙해 질무렵 프랑스어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영어가 술술 녹이는 버터 발음었다면 불어는 노랫소리 같기도 한 것이 새소리 같기도 해서 나의 모든 근육을 활용해서 그 노래를 제대로 부르고 싶었다.그렇게 그 노랫소리에 홀려 대학교때도 프랑스어과로 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 불어과가 총 2반으로 총 80명 남짓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중에 프랑스어를 대학 때까지 전공으로 한 사람은 나까지 10명 남짓 되는 것 같고 그 이후로 프랑스어로 계속 밥벌이를 했던 사람은 나와, 어릴 때 프랑스에서 살다 온 친구, 그리고 내 뒤로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 그렇게 셋이 유일하다.
80명에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마지막 생존자 3명에 들었다니 어쨌든 TOP 3에 들었다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나의 프랑스어 연대기 III -불란서어 밥벌이 11년 차
그렇게 TOP 3 (?)에 들고 난 뒤 나는 여전히 '전공불문'으로 최종 생존을 해나가고 있다. 배운걸 꼭 써먹고 싶다는 집념 때문이었는지 운 좋게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나의 밥벌이를 책임져 주고 있는 고마운 프랑스어 이지만, 또 오래 한 만큼 애증도 애정도 많은 언어다. 정말 너무 어렵게 배웠는데 아직도 쉽지가 않다
프랑스어만을 무기로 삼아 사회에서 살아남기에는 녹록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주 무기로 열일해주고 있는 프랑스어. 온갖 해외파, 교포, 원어민 공세에도 국내파로 꿋꿋하게 살아남은 서바이버였는데 기나긴 휴직 뒤에 복직을 앞두니 괜스레 약해지는 것만 같은 서바이버 정신을 다잡고 싶어 기록을 시작한다.
프랑스 명품회사에서 시작해, 통번역대학원을 지나 대학원 졸업 후 대기업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그리고 지금의 외국계 회사로 이직하기 까지 총 11년간 '전공 불문'으로 살아남은 이야기와 앞으로 살아남을 이야기.
개봉박두.